[고규홍의 식물 이야기] 궁핍의 기억 간직한 이팝나무

입력 2010-05-10 17:46


몹시도 짓궂던 봄이 꼬리를 감추면서 빠르게 여름으로 접어들고 있다. 이 즈음 농촌은 한 해 농사를 준비하기 위해 바빠진다. 때맞춰 농촌을 환하게 밝혀주는 나무가 있다.

이팝나무다. 쌀밥을 뜻하는 옛 말인 ‘이팝’을 이름으로 가진 이 나무는 나무 전체에 고봉으로 소복이 담아낸 쌀밥을 닮은 하얀 꽃을 소담하게 피운다. 그런 이름이 붙은 이유다. 농부들은 이 나무에 꽃이 잘 피어나면 그해 농사에 풍년이 들고, 제대로 피어나지 않으면 흉년이 온다고 믿어 왔다.

터무니없는 속설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여기에는 옛 사람들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지혜가 담겨있다. 이팝나무에 꽃이 필 즈음은 바로 논에 물을 대고, 모를 낼 시기다. 한 해 농사의 시작이지만, 풍년과 흉년을 가를 만큼 중요한 때이니만큼 비도 적당히 내리고, 기온도 적당해야 한다. 모가 논에 뿌리를 잘 내려야 벼는 무럭무럭 자랄 것이고, 그래야 알곡이 통통하게 익어, 가을의 소출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 상황은 벼뿐 아니라, 나무를 포함한 식물 모두에게 마찬가지다. 논에 심은 모가 뿌리를 잘 내릴 만큼 좋은 기후라면 나무로서도 꽃을 잘 피울 만큼 좋은 상황이다. 나무는 당연히 꽃을 잘 피울 것이다.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진 건 아니지만, 이팝나무와 벼는 그렇게 똑같은 조건을 바탕으로 자란다. 결국 이팝나무에 꽃이 잘 피었다면 벼도 뿌리를 잘 내릴 수 있는 상황이다. 풍년을 예측하는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옛 사람들의 이야기이지만, 그 안에 과학이 담긴 것이다.

물푸레나무과에 속하는 이팝나무는 남부 지방의 마을 주변이나 개울가에서 자라는데, 꽃이 아름다워 공원이나 길가에 아름다운 풍광을 조성하기 위해서도 많이 심어 키운다. 특히 이팝나무의 꽃은, 이른 봄에 피었다가 서둘러 낙화하는 다른 봄꽃들에 비해 개화기가 긴 편이다. 대개는 5월 초에 피어나기 시작해서 적어도 보름 넘게 하얀 꽃을 나무 전체에 달고 있어서 풍치를 꾸미기에 좋은 나무다.

이팝나무에 얽힌 전설은 대부분 궁핍한 시절의 이야기들이다. 이를테면 전북 진안의 오래된 이팝나무는 흉년이 들어 제대로 먹지 못해 죽은 어린 아이를 뒷산에 묻고, 살아서 못 먹은 쌀밥을 죽은 넋이라도 실컷 먹으라고 무덤 곁에 심은 것이라고 한다. 입으로 먹지 못한 쌀밥을 눈으로 대신하기 위해 조상들이 남긴 “서러운 유산”이라는 어떤 시인의 노래가 꼭 맞는 나무다.

천리포수목원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