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조용래] 신화 속의 나라 그리스

입력 2010-05-10 17:47

헬레니 공화국(Hellenic Republic). 그리스의 공식 영어 표기다. 그리스는 라틴어 표기 ‘그라에키아(Graecia)’에서 유래해 오늘날 통칭이 됐지만 그리스에서는 자기 나라를 ‘엘리니키 공화국’ 또는 ‘엘라스’라고 부른다.



고대 그리스 극작가 아폴로도로스의 ‘그리스신화’에 따르면 엘라스는 불의 신 프로메테우스의 아들로서 처음으로 발칸 반도에 나라를 세운 헬렌을 칭한다. 헬렌이 제우스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나라 이름에 신화 속 인물이 등장한다는 사실이 뭔가 모르게 그리스답다는 느낌이다.

그리스는 세계 최초로 뿌리 내린 민주 정치와, 변설 논증 등 철학의 의미를 인류에게 전해줬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남유럽의 풍광 좋은 관광지라는 느낌이 더 강하다. 올리브나무로 뒤덮인 발칸 반도와 에게해에 흩뿌려진 3000여개의 크고 작은 섬이 사시사철 사람들을 유혹하기 때문이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도 15곳이나 있다. 선조들의 역사와 문화가 지금의 그리스를 먹여 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구는 1100만명이지만 한 해 외래관광객은 그 배에 가깝다. 2008년 관광 수입은 175억 달러로 GDP의 15%나 된다.

세계 10위권의 관광대국 그리스가 지금 글로벌 금융전쟁의 진앙으로 부상했다. 원인은 재정 악화다. 만성적인 무역적자를 관광 수입과 그리스 이민자들의 해외 송금으로 메워왔고, 사회복지 지출과 방만한 재정운영이 곪아터진 결과다. 게다가 2008년 9월 이후 글로벌 금융위기로 외래관광객 감소와 GDP의 8%를 차지하는 해운업의 위축은 재정 악화를 더욱 부추겼다.

2009년 10월 5년 만에 중도좌파인 전(全)그리스사회주의운동(PASOK)이 정권을 잡으면서 전임 중도우파 신민주주의당(ND) 정부의 재정적자 은폐 사실이 드러났다. GDP 대비 4%로 알려졌던 재정적자는 실제론 13%, 올 정부 채무는 GDP의 113%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면서 국가 파산이 공공연하게 거론되기 시작했다.

그리스가 유럽연합(EU) 회원국이라는 점에서 그리스의 위기는 EU 전체, 나아가 세계 금융시장의 요동으로 바로 이어졌다. 부랴부랴 EU와 국제통화기금(IMF)은 앞으로 3년 동안 1100억 유로(약 161조원)의 구제금융을 지원하기로 했지만 사태는 아직 수습되지 않고 있다.

사회보장도 좋지만 과분한 지출, 현실감 없는 재정운용이 결과적으로 그리스를 신화 속의 나라에서 못 벗어나게 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재정건전성의 중요함을 거듭 곱씹게 된다.

조용래 논설위원 choy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