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설동순 (6) 부모 결혼반대에 반발 보란듯이 도망
입력 2010-05-10 17:36
살림이 빠듯할수록 자주 먹게 되는 게 깻잎이다. 상이 푸짐할 때는 젓가락이 잘 안 가지만, 찬이 없어 찬밥에 물 말아 먹어야 할 때는 그렇게 고마울 수 없는 반찬이다. 그래서 제일 어렵게 살던 시절에도 깻잎 김치와 장아찌는 늘 떨어지지 않게 담곤 했다.
깻잎으로 김치를 담글 때는 어리고 연한 잎으로 골라야 한다. 억센 잎으로 담으면 익어갈수록 맛이 없다. 반면 고추장 장아찌로 담을 깻잎은 자잘하면서도 빳빳하고 싱싱한 것으로 골라야 제맛이다. 고추장에 오래 담가 둬도 향긋한 맛과 향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어려서도 넉넉지 않은 집에서 자랐지만 내 일생 최대 고비는 신혼 때였다. 이유는 말하나마나 가난한 남자를 만나 결혼했기 때문이다.
좋다는 선 자리 다 마다하고 스물다섯에 나보다 열 살이나 많은 사방관리소 임시 직원과 연애를 시작했다. 바로 지금의 남편이다. 소개받을 때는 분명 ‘학력도 집안도 괜찮은 남자’라고 들었건만 실제로 만나 보니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이 하나뿐인, 그날 벌어 그날 먹는 처지였다.
사람 마음이란 것은 참 이상해서, ‘이 남자 참 불쌍하다’ 싶더니 곧 정이 들고, 결혼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난 지 6개월쯤 되자 나는 집에 결혼하겠다고 통보했다.
나이 꽉 차서 시집 안 간다고 눈치를 주던 부모님이신지라 어디든 가겠다고 나서기만 하면 환영일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아버지는 경찰인 오빠를 통해 신원조회한 내용까지 들이대며 “이렇게 쥐뿔도 없는 넘한테 간다고 시방까지 그 똥고집을 피고 있었어야!” 하면서 호통을 치셨다.
“저도 잘난 거 하나 없지 않어요.” “뭣이여! 여자가 자기 잘난 것으로다가 시집을 간다냐! 느이 오빠 잘 키워서 경찰 맨들어 놨으면, 그게 느이 오빠만 위해서 헌 일이여! 그 덕에 너도 시집 잘 가고, 집안 일으키라고 헌 일이지. 잔말 말고, 오늘부터 문밖출입 금지니께 그리 알어!”
무섭게 닦아세우기는 하셨지만 부모님은 크게 걱정하시는 것 같지 않았다. 어려서 교회에 못 가게 했을 때나, 중학교에 안 보냈을 때나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입을 내민 채 서성대고, 시키는 일을 미적대면서 한동안 속을 썩였지만 결국 부모님 뜻을 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는 달랐다. 둘이 도망을 간 것이다. 나는 당돌하게도 “형오씨, 우리가 좋으면 됐지 뭣이 걱정이요? 결혼해서 삽시다!”라고 먼저 말했고 실제로 짐을 싸서 집을 나왔다.
그렇게 둘이 찾아간 곳은 처음 우리를 소개해 준 사방관리소 직원 집이었다. 거기서 며칠, 남편 동료 직원의 집에서 며칠, 이렇게 열흘쯤 지내고 있을 때 어머니가 어떻게 수소문을 했는지 찾아오셨다. 이런저런 말로 달래고 설득해도 되지 않자 “자식 이기는 부모가 있겄는가” 하시면서 약혼을 시켜줄 테니 집으로 돌아오라고 하셨다. 살면서 처음으로 부모님께 내 뜻을 관철시킨 것이었다.
당시 내 삶의 과정들에 하나님의 어떤 뜻이 있으셨는지 지금도 짐작할 수가 없다. 다만 그때 불현듯 내 안에서 터져나온 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셨다는 ‘자유의지’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태어나 처음 맛본 자유의지의 달콤함은 짧았고 대가는 컸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