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문명 사이, 달빛으로 다리를 놓다… 재미 작가 임충섭 4년 만에 국내 개인전

입력 2010-05-09 17:32


전시장에 달이 떴다. 하늘에 뜬 달과 물 위에 비친 두 개의 달이다. 하늘의 달이 절대자연을 지칭한다면 물 위의 달은 문명사회를 상징한다. 이를 통해 서구의 이분법적 사고를 비판하고 자연과 문명의 연계를 시도한다. 그것은 “물에 비친 달도 달”이라며 실재와 허상이 하나임을 설파했던 16세기 퇴계 이황의 철학과 맥을 같이한다.

미국 뉴욕에서 활동하는 작가 임충섭(69)이 30일까지 서울 소격동 학고재에서 여는 개인전에 내놓은 ‘월인천강’(月印千江). 다듬이질 소리와 농사 짓는 소리, 늑대의 울음소리 등이 들리는 가운데 전시장 벽에 찼다가 이지러지는 달의 모습이 투사되면 살아있는 물고기 네 마리가 헤엄치는 인공 연못 위로 달의 이미지가 반사되는 작품이다.

충북 진천 출신인 작가는 서울예고 시험 보는 날 이젤을 처음 구경했을 정도로 어렵게 미술을 공부했다. 서울대 미대 졸업 후 뉴욕으로 건너가 생계수단으로 접시닦기, 화장실 청소, 집수리 등 안한 게 없다고 한다. “몇 만개의 햄버거를 먹었지만 아직도 내 몸에서는 된장냄새가 나요. 어릴 적부터 봐왔던 달을 통해 동양정신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1980년에 뉴욕의 유수 화랑인 오케이 갤러리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개인전을 가진 작가는 자연과 문명 사이에서 동양화의 여백을 제시하는 작품으로 주목받았다. 사각의 캔버스를 과감히 해체하고, 동·서양의 재료를 다양하게 활용하는 비디오 영상설치 작업으로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스미소니언 허쉬혼뮤지엄 등에 작품이 들어갔다.

4년 만에 국내 개인전을 여는 작가는 10년 동안 준비했던 작업을 선보인다. “서구문명에서는 꽉 찬 햇님이 중심이고 동양에서는 줄임과 여백의 달님이 정신세계의 근거가 되지요. 이번 달은 하와이 달이기도 하고, 다큐에 나오는 달이기도 해요. 피라미드처럼 쌓기도 하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현대적 조형언어로 해석하기도 했어요.”

전시에서는 2000년대 이후 10년을 돌아보며 동양의 정신성을 보여주는 작품 40여점이 소개된다. ‘두루미 두루마기’는 두루마기를 추상화해 표현한 작품이며, 명주실을 이용한 ‘오름·내림’은 한국의 전통 베 짜기를 연상시킨다. 자신만의 풍경언어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풍경’ 연작, 잠재의식 속에 있는 미적인 기호와 조형적 이상향을 채집한 ‘화석 풍경’도 눈길을 끈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현대문명과 자연 사이에서 얻어진 여행담”이라고 말한다. 그가 사는 곳은 현대 문명의 총체라고 할 수 있는 도시, 그 중에서도 가장 도시적 속성이 두드러진 뉴욕이다. 유년기에서 비롯된 자연에 대한 향수를 품고 그는 매주 도심 속에서 자연을 찾아 한 시간 남짓 드라이브를 한다. 그는 이를 ‘의식여행’이라 일컫는다.

이 여행으로 문명의 틈새에 스며들어 있는 자연을 발견하고 때로는 단절돼 있는 듯, 때로는 대조적인 이 둘 사이에 미술언어로 조형적 다리를 놓아가는 것이 그의 작업이다. “일단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든 뒤 줄임과 생략을 통해 재창조해야 작업이 완성되는데, 그 줄임과 생략이 바로 여백”이라는 그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을 비운 달님에 동화되는 기분이다(02-720-1524).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