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꼬마화가, 도화지 가득 희망을 그려요
입력 2010-05-07 17:42
‘사랑하는 엄마 아빠! 무럭무럭 건강하게 키워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큰 기쁨이 되는 아들이 될께요! 사랑해요!!!’
서울 인사동 갤러리 포유에서 5일 개막한 ‘행복한 꼬마 화가’ 박세준(서울 일원동 밀알학교 6)의 그림 전시회에는 어버이날 엄마 아빠에게 드리기 위해 그린 카드도 걸려 있다. 전시회를 열만큼 그림솜씨가 빼어난 세준이가 만들었다고 보기에는 영 엉성하다. 그래도 세준이의 엄마 윤혜선(44·서울 도곡동)씨와 아버지 박원하(50·사업)씨는 삐뚤빼뚤한 글씨를 보고 또 보며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윤씨는 “학교에서 단체로 만든 카드”라면서 “우리 세준이가 그래도 인지기능이 많이 발달했다”고 자랑했다. IQ가 아니라 인지기능? 세준이는 발달장애 1급 판정을 받은 자폐아다. 하지만 그림에는 천부적인 자질을 보이고 있는 특별한 아이다. 2008년 서울 강남구청 주최 그림그리기대회 은상을 시작으로 미술대회에서 여러 차례 수상했다. 2009년 9월에는 제30회 세계아동미술교류전에도 출품해 세계 각국의 전문가들에게 칭찬을 받기도 했다.
첫 개인전을 연 꼬마 화가는 개막식에서도 곧잘 딴청이었다. 낯선 손님들이 말을 걸면 눈을 맞추지 않은 채 모른 척하거나 화장실로 숨어버렸다. 손님 접대는 윤씨 몫이었다. 네 살이 넘도록 말도 못하고 눈 맞춤도 피하던 세준이를 개인전까지 연 의젓한 소년으로 키워낸 것이 오롯이 그의 몫이었듯.
“질병은 치료가 되지만 장애는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의사 선생님 설명을 들었을 때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어요. 집에 돌아와서도 울면서 지냈지요.”
첫딸에 이어 얻은 아들이어서 기대가 컸다. 뽀얀 피부에 쌍꺼풀진 큰 눈, 오똑한 콧날. 너무나 잘생긴 아들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야 한다니 억장이 무너졌을 일이다. 며칠을 울고 난 윤씨는 털고 일어섰다. 운다고 해결될 일이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림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안 것은 정말 우연이었어요. 다섯 살 때였어요. 언어치료 교실에 갔는데, 선생님들께서 세준이가 그린 그림을 보라고 하시는 거예요.”
교실 한쪽에 있는 화이트보드에 세준이가 그린 사자. 너무나 잘 그려 곧 포효할 것 같은 사자를 보고는 윤씨도 놀랐다. 동물을 좋아해 어린이대공원에 자주 갔고, 그때마다 사자우리 앞에서 떠날 줄 몰랐던 세준이는 사자의 수염까지 고스란히 그려냈던 것. 집에 돌아온 윤씨는 스케치북과 색연필을 주었다. 앉은 자리에서 한권을 다 그렸다. 그렇게 그림 그리기를 시작한 세준이는 언어와 인지 기능이 부쩍 좋아졌다. 자기가 그린 그림을 설명하면서 말도 늘었고, 사람들과 눈 맞춤도 곧잘 했다.
“정말 열심히 그렸어요. 연필을 잡은 왼손에 변형이 올 정도로요. 사람들은 서번트 신드롬이라고 하지만 꾸준히 그렸기 때문에 재능이 빛을 발한 것 같습니다.”
서번트 신드롬은 자폐 등 뇌기능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이와 대조되는 천재성을 갖는 현상을 가리킨다. 2절지 도화지를 쓰는 세준이는 5∼10분이면 드로잉을 끝낸단다. 여러 장 그린 것 중 마음에 드는 것만 색칠을 하고, 그 중에서도 흡족한 것은 벽에 붙여놓는다고. 현재 완성작은 50여점.
윤씨는 세준이가 꼬마화가로 성장하는 데 해준 게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언제든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색연필 물감 도화지를 준비해준 것뿐이라고 했다. 그저 집안이 어질러져도 야단치지 않고 그대로 놓아 둔 것뿐이라고 했다. 윤씨가 손을 내젓자 개막식에 참석했던 세준이 외할머니 곽경옥(75·서울 도곡동)씨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세준 에미는 세준이를 위해서 직장을 그만 두고 특수아동교육 과정까지 들었어요. 그렇게 녹록한 성품이 아닌데 세준이를 가르칠 때는 10번 20번 반복해요. 정말 참을성이 대단해 이게 내 딸인가 싶을 정도에요.” 세준 아빠도 “그동안 집사람이 많이 힘들었을 것”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세준이가 짊어지고 있는 ‘장애’를 뚝 떼어내고 싶은 윤씨에게 ‘장애’와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준 정도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장애 진단을 받고도 몇 년 동안은 벽 보고 얘기를 하는 것 같았어요. 서서히 조금씩 좋아졌어요. 부모는 아이들을 기다려줘야 합니다. 기다리는 동안 성장합니다. 비장애아들도 마찬가지지요.”
윤씨는 장애아는 물론 비장애아들도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이 반드시 있다면서 그것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부모 몫이라고 했다. 자폐아 부모들이 자식보다 하루 더 살기를 바란다는 말이 있다고 하자, 윤씨는 도리질을 했다.
“저는 세준이가 베풀면서 더불어 살 줄 아는 아이로 자라길 바랍니다. 그래서 가정도 이루고 그림도 그리면서 행복하게 살길 바랍니다.”
지난해 장애아동후원을 위한 미술전시회에서 세준이 작품이 판매됐을 때 “사회를 위해 세준이가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 기뻤다”는 윤씨는 “이번 어버이날 정말 큰 선물을 받았다”며 연신 싱글벙글이다.
세준이의 개인전은 갤러리 포유(02-738-7911)에서 11일까지 이어진다. 같은 기간 서울 광화문 지하도 광화랑에서 전시되는 제24회 서울지적장애인사생대회 수상작 전시회에서도 세준이의 그림을 볼 수 있다. 세준이는 이 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김혜림 선임기자 ms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