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설동순 (5) 교회도 진학도 포기한 채 공장으로
입력 2010-05-06 17:27
고추장 장아찌 중에 제일 정성이 많이 드는 것은 굴비장아찌다. 조기 내장을 빼고 손질하는 데만도 공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도 해놓으면 제일 뿌듯한 게 이 장아찌다. 손질한 조기는 소금물에 넣어 씻은 뒤 말린다. 만일 여름에 매달아 말린다면 파리떼가 ‘이게 웬 떡이냐’며 달려들 테니 요즘처럼 선선할 때 말려야 한다. 덜 말린 채로 쓰면 비린내가 난다. 꾸덕꾸덕 충분히 마른 조기를 고추장 단지에 쿡 박아놓고 고추장이 충분히 스며들었으면 새 고추장으로 갈아주기를 두 번 정도 하면 된다. 이렇게 만든 굴비장아찌는 그야말로 밥상의 보물이다. 중요한 손님이 와도 상에 이것 하나만 내놓으면 충분히 생색이 난다.
물론 나는 어려서 이런 귀한 음식은 거의 먹지 못했다. 어머니는 가끔 담그더라도 손님 접대할 때가 아니면 아버지와 오빠 밥상에만 살짝 내주곤 하셨다. 그때는 어머니가 야속했지만 지금은 나부터가 이렇게 정성이 든 음식을 보면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난다. 아버지의 속정을 알기 때문이다. 어린 나를 교회에 못 가게 하신 것도 딸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그러셨던 것이라고 지금은 이해한다.
감시하고 쫓아다니고 몇 번은 붙잡아 때리기까지 했는데도 내가 말을 듣지 않자 아버지는 최후통첩을 내렸다. “너하고 나하고 뒷산 배나무 밑에 가서 죽자!”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고집을 부린다고 마음을 돌릴 아버지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하는 수 없이 교회 발길을 끊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언젠가는 간다. 내 안에는 주님이 계시니까’라는 마음이 있었다.
그때 나에게는 교회에 못 가는 것도 시련이었지만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것도 큰 슬픔이었다. 고개 하나만 넘으면 중학교가 있는데, 친구들은 거의 진학을 하거나 사정이 안 되면 서울에 식모살이 가서라도 야간학교를 다녔는데, 나는 그저 일손을 도와야 한다는 이유로 집에 남았다.
당시 오빠는 경찰이 돼 서울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오빠는 집에 올 때마다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우리 동순이, 오빠가 나중에 서울 데려가서 학교도 보내주고 시집도 보내주고 허께”라고 했다. 그러나 막상 진학할 때가 되자 “서울 오빠 집에 가서 공부하겠다”고 나설 용기가 없었다. 또 결혼을 해서 조카 낳고 분주하게 살고 있어서인지 오빠도 그 말을 기억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배움을 끝내기는 너무나 서운했다. 집에서 혼자 신문을 놓고 한자를 베껴 써보고, 영어 알파벳을 끼적거려 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혼자 공부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곧 나는 집에서 멀지 않은 가내수공업 공장에 다니게 됐다. 대나무로 장식용 작은 양산대를 만드는 일이었다. 대나무를 쪼개서 작은 기계에 넣어 볼펜심처럼 둥글고 길게 만든 뒤 1000개 단위로 묶는 단순한 일이었다. 동네 언니 대여섯 명과 둘러 앉아 라디오도 듣고 유행가도 부르며 그저 시간이 어서 가기만 바랐다.
“참을 수가 없도록 이 가슴이 아파도 여자이기 때문에 말 한마디 못하고…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보냅니다. 여자의 일생”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을 부르며 ‘다 이렇게 사나 보다’ 하고 체념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 안에는 자신도 모르는 불만의 싹이 자라고 있었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