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탈·유출·수난의 민족문화유산을 지키다… ‘간송 전형필’

입력 2010-05-06 17:34


이충렬/김영사/간송 전형필

한글을 만든 원리와 문자 사용에 대한 설명과 용례를 밝힌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70호), 고려청자의 백미로 꼽히는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국보 68호), 조선 인물 풍속화의 진수인 신윤복의 ‘혜원풍속도’(국보 135호), 조선 세종 때 엮은 음운서인 ‘동국정운’(국보 71호)….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대표적인 문화재들이다. 간송미술관은 국보 12건, 보물 10건, 서울시 지정문화재 4건을 포함해 귀중한 문화유산들을 보유하고 있다. 소장 문화재 면면을 보면 사립미술관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김정희 정선 심사정 김홍도 장승업 신윤복 등 조선시대 주요 화가들의 서화, 서책, 고려 및 조선의 자기, 석탑과 불상 등 소장품 중에는 문화재 지정 신청을 하지 않았을 뿐 국보·보물급 문화재들이 상당수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가히 ‘민족 문화유산의 보물창고’라고 할 수 있다.

간송미술관이 이렇게 많은 문화재를 소장할 수 있었던 데는 한 선각자의 열정과 우리 문화재에 소명의식이 자리잡고 있다.

작가 이충렬은 한반도의 문화재가 일본으로 무더기로 유출되던 일제강점기 때 사재를 털어 우리 문화유산을 지켜낸 간송(澗松) 전형필(1906∼1962)의 삶을 평전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방대한 자료 수집과 고증을 바탕으로 간송의 삶과 시대를 되살려 냈다. 간송의 삶을 생동감 있게 그려내기 위해 일부 상상력을 동원하기도 했지만 간송의 생애와 시대상황, 문화재의 가치 등을 왜곡하거나 훼손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간송의 큰아들 전성우 간송미술관장의 공인과 감수까지 받았다.

책에는 간송이 전국 각지와 일본까지 오가며 문화재들을 수집하게 된 과정들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1926년 휘문고보를 거쳐 29년 일본 와세다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한 전형필은 귀국 후 당대 최고 서예가이자 고서화 감식가였던 위창 오세창(1864∼1953)의 지도를 받아가며 30년대부터 우리 문화재 수집에 뛰어들었다. 스물 넷에 물려받은 엄청난 유산을 바탕으로 서화와 서책, 도자기, 석조물 등 귀중한 문화재들을 사들였다. 가치가 있고 보존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미술품은 값을 따지지 않았다.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은 당시 서울 기와집 20채 값에 해당하는 2만원에 사들였고, 일본에 유출됐던 신윤복의 풍속도 ‘혜원전신첩’은 2만5000원에 되사왔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영국 귀족출신 변호사가 20년 가까이 모은 국보급이 포함된 고려청자 20점은 40만원에 매입해 국내로 들여왔다. 참기름병으로 쓰였던 ‘청화백자 양각진사철재 난국초충문병’(국보 294호)은 1만5000원에, ‘훈민정음 해례본’은 1만원에 각각 사들였다.

그는 특히 일제 말기인 43년 경북 안동에서 사들인 훈민정음에 남다른 애착을 보였다. 일제가 한글을 탄압하던 시기여서 꼭꼭 숨겨뒀다 해방이 된 후에야 훈민정음을 공개한 그는 한국전쟁 때 피난을 갈 때도 품속에 품고 다녔고 잘 때는 베개 속에 넣어 지켰다.

간송이 수집한 문화재는 삼국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전 시대에 걸쳐 있다. 서화는 물론 조각과 공예 등 조형미술의 모든 분야를 망라한다. 간송미술관 소장품만으로 한국미술사를 서술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는 문화재 수집에 많은 재산을 들인 데다 말년에 자신이 인수한 보성중고등학교의 빚을 갚느라 생활이 어려워 집과 땅을 팔았지만 소장품들은 끝까지 지켜냈다.

그가 38년 서울 성북동에 개관한 한국 최초의 사립박물관 보화각은 66년 간송미술관으로 이름을 바꿔 국내 대표적인 문화재 미술관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저자는 간송의 문화재 수집에 대해 “조선의 문화예술사에 관한 연구가 거의 없던 시기였기에 외롭고 어려운 길이었고, 일제가 흔적까지 지우려 했던 조선의 혼을 지키는 일이었기에 곤혹스러운 일도 겪어야 했다”면서 “그러나 간송 전형필은 허허 웃으며 그 길을 갔다”고 적었다.

책에는 우리 문화재에 남다른 애정을 품고 유물 수집에 매진해 온 선각자 간송의 열정과 사명감이 배어 있다. 또 간송 후손들의 협조를 얻어 구한 100여장의 귀한 문화재 도판 등이 실려 있어 문화유산을 감상하는 즐거움도 맛볼 수 있다.

라동철 기자 rdch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