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김상온] 북한의 존재이유

입력 2010-05-05 17:51


“북한의 도발은 계속될 것. 남한 적화 없이 북한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책을 한 권 번역한 적이 있다. 북한이 2006년 10월 1차 핵실험을 한 뒤였다. 핵전쟁 이후의 세상과 인간의 삶을 주제로 저명 과학소설가들이 쓴 작품을 묶은 소설선집.



내가 이 책을 번역한 것은 북한이 핵실험을 통해 실질적 핵보유국이 됐음에도 무감각한 우리 사회에 핵무기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북한 핵에 관한 책을 쓰려다 딱딱한 숫자나 복잡한 정치적 분석 등을 나열하기보다는 비록 소설일망정 핵 재앙 이후 닥칠 비극에 관해 거장으로 추앙받는 작가들의 빛나는 통찰을 소개하는 게 더 낫겠다 싶었다.

책이 나온 후 인터넷에 올라온 독자들의 평을 읽었다. 그 중 하나를 보는 순간 기가 막혔다. 번역 동기를 역자 후기에 실었는데 그것이 한마디로 ‘깬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심형래 감독의 영화 ‘D-워’를 들먹였다. 북한 핵을 운위한 게 괴수영화에 애국을 덧씌운 심 감독과 ‘같은 수준’이라는 비아냥이었다.

이런 평은 또 없었다. 그러나 이 독자와 ‘같은 수준’의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게 현실이다. 북한 핵무기는 우리와 아무런 관계도 없고, 북한의 대남 무력 위협은 ‘안보 장사’에 열 올리는 우파 기득권층의 선전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이들.

실제로 천안함 침몰과 관련해 대통령이 전군 주요지휘관회의를 주재하고 안보태세 강화를 강조한 것을 두고 ‘안보 장사’라고 폄하하거나 김정일 방중을 놓고 천안함 얘기는 단 한마디도 없이 6자회담 얘기나 하고 있는 야당들을 보라. 북한의 소행이라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며, 왜 공연히 대북 적대감을 부추기느냐며 눈물겨울 정도로 북한을 감싸고도는 언필칭 진보, 곧 친북편향 언론들을 보라.

하긴 천안함 침몰 원인에 관한 객관적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심증마저 없는 것은 아니다. ‘오컴의 면도날’이나 셜록 홈스의 ‘소거법’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그것이 북한 소행일 개연성은 차고 넘친다.

그럼에도 만에 하나 북한 소행이 아닐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보고 천안함 사건은 차치하자. 세 차례 서해 해전을 비롯해 북한이 왜 대남 도발을 끊임없이 자행하는지 많은 국민이 의문을 갖고 있을 것이다. 이 의문의 답은 가장 근본적인 데서 찾아야 한다. 바로 북한의 존재이유다.

북한은 처음부터 남한이 없으면 성립할 수 없는 존재였다. 이는 당초 남한도 마찬가지였지만 오늘날 남한은 북한과 전혀 상관없이 살아갈 수 있는 존재로 탈바꿈했다. 하지만 북한은 여전히 남한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왜 그런가? 남한 적화야말로 북한이 존재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하마스 등 팔레스타인 무장조직의 존재 이유가 이스라엘인 것과 다르지 않다.

북한 헌법보다 우위에 있는 조선노동당 규약을 보자. 노동당의 당면 목적이 ‘공화국 북반부에서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이룩하며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해방과 인민민주주의 혁명과업을 완수’하는 것으로 돼있다. 여기서 ‘전국’이 한반도 전역을 의미함은 물론이다.

말끝마다 ‘혁명’을 부르짖는 북한의 혁명관은 또 어떤가. 북한의 혁명 목표는 첫째, 북한 내에서의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 둘째, 남한지역에서 인민민주주의 혁명 완수, 셋째, 세계 공산화혁명이다. 그중 세 번째는 물 건너갔고, 중요한 것은 첫 번째와 두 번째지만 북한 내 혁명은 ‘남조선 혁명을 위한 기지 강화’에 불과하다. 혁명의 궁극 목표 역시 남한 적화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은 앞으로도 무력이건 뭐건 모든 수단을 동원해 간단없이 남한을 집적대고 도발할 게 틀림없다. 그리고 그 방법, 우리로서는 악몽일 시나리오는 많다. 제3국 테러리스트들과 연계해 남한 몇몇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폭탄테러를 일으킨다면? 남한 식수원 몇 곳에 세균을 집어넣거나 지하철 등에 가스를 살포한다면? 그에 대한 대비책이 마련돼 있는지도 걱정스럽지만 그런 사태가 발생해도 북한 소행이라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 아니면 남한이 북한 말을 안 들어주니까 그렇게 된 것 아니냐며 난리칠 사람들이 나는 더 두렵다.

김상온 카피리더 so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