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태원준] 민간인 전성시대
입력 2010-05-05 17:49
천안함 침몰 원인을 규명하는 민·군 합동조사단의 윤덕용(70) 공동조사단장과 ‘스폰서 검사 의혹’ 진상규명위원회의 성낙인(60) 위원장. 두 사람의 공통점은? ‘민간인’이다.
윤 단장은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응용물리학을 전공하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 원장을 지냈다. 현재 KAIST 신소재공학과 명예교수. 성 위원장은 프랑스 파리2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한국법학교수회장을 맡고 있는 서울대 법대 교수다.
평생 학자의 길을 걸어온 두 교수에게 조사와 진상규명을 부탁한 기관은 국방부와 대검찰청. 윤 교수가 먼저였고, 이명박 대통령이 그렇게 하도록 지시했다.
이 대통령은 지난달 6일 국무회의에서 김태영 국방부 장관에게 “현재 군이 맡고 있는 합동조사단의 책임자도 민간 전문인사가 맡아야 한다”고 말했다. 닷새 뒤 11일 국방부는 “객관적이고 투명한 조사를 위해서”라며 윤 교수를 공동조사단장에 위촉했다. 130명 규모의 합동조사단에는 윤 교수를 비롯해 민간인 30여명이 참여하고 있다.
스폰서 검사 의혹을 제기한 MBC ‘PD수첩’이 지난달 20일 방송되자 검찰은 이틀 만에 민간인을 위원장으로 위촉했다면서 진상규명위원회 명단을 발표했다. 조은석 대검 대변인은 “법조계와 학계에서 신망이 두텁고 재판과 수사 제도에 정통한 분”이라고 성 위원장을 소개했다. 실제 조사는 검사들로 꾸린 조사단이 담당하고 위원회는 이 조사단을 지휘한다. 진상규명위원 9명 중 7명이 민간인이다.
천안함은 군함이다. 군함이 침몰한 원인을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은 군인일 것이다. 군은 수많은 무기 전문가와 엄청난 예산을 갖고 있다. 검찰은 조사가 직업인 사람들의 집단이다. 의혹을 파헤치는 데 그들보다 탁월한 두뇌와 노하우를 가진 사람이 있을까.
이런 두 집단이 민간인들에게 역할을 대신해 달라고 요청했다. 민간인에겐 있는데, 군과 검찰엔 없는 것은? 신뢰다. 이 대통령은 국민이 군을 믿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검찰은 스스로 ‘국민이 우리 말을 믿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사전은 민간인을 ‘관리나 군인이 아닌 일반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군과 검찰이 ‘일반 사람’에게 역할을 내준 게 처음은 아니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국방부 국방선진화추진위원장에 이상우 전 한림대 총장, 국방개혁실장에 홍규덕 숙명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를 임명했다. 국방개혁의 틀을 만들고 이를 실천하는 자리에 군인 대신 민간인을 앉혔다. 당시 청와대는 “군인들로만 구성된 폐쇄적인 조직에 민간인을 많이 채워 넣을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1999년 한국조폐공사 노동조합 파업 유도 사건과 옷로비 의혹 사건으로 특별검사제가 도입됐다. 이용호 게이트, 대북송금, 노무현 대통령 측근 비리, 러시아 유전개발, 삼성 비자금, BBK 등 각종 의혹 사건을 검찰 대신 수사한 특별검사도 민간인이다. 검찰이 미덥지 못할 때 그 역할을 일시적으로 빼앗아 민간인 법률가에게 맡기도록 아예 제도화돼 있다.
군과 검찰의 구원투수로 등판한 윤 교수와 성 교수는 ‘민간인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윤 교수가 국방부 브리핑룸에서 조사 상황을 직접 설명하면서 군이 무슨 말을 해도 믿기 힘들다던 분위기는 조금씩 바뀌었고, 야당이 스폰서 검사 의혹 특별검사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지만 아직 특검까지 해보자는 여론은 뜨겁지 않다. 이쯤 되면 ‘민간인 전성시대’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
하지만 민간인에게 신뢰를 빌리는 것도 한두 번이다. 너무 잦으면 정치인들처럼 된다. 우리나라 정당은 언제부턴가 선거 공천심사위원회에 정치권 밖의 ‘민간인’을 참여시키고 있다. 역시 객관적이고 투명한 공천을 위해서라는데 선거 때마다 공천을 둘러싼 잡음은 어김없이 불거져 왔다. 이번 6·2 지방선거에도 각 당은 ‘민간인 효과’를 기대하며 외부 인사를 각급 공천심사위원에 위촉했지만 지방선거의 최대 문제점으로 요즘 지적되는 게 바로 공천이다.
태원준 특집기획부 차장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