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설동순 (4) 초교 졸업과 동시에 ‘교회 출입금지령’

입력 2010-05-05 17:30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그해 나는 열 살이었지만 1학년이었다. 남들보다 2년 늦게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열여섯에 졸업할 때까지 6년간은 열심히 교회에 다녔다. 내 어린 시절의 유일한 즐거움은 신앙생활이었다.



시련은 학교 졸업과 동시에 찾아왔다. 아버지로부터 “인자 교회 그만 나가거라” 하는 명령이 떨어졌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교회당은 연애당’이라고 굳게 믿으셨던 것이다. 문제는 나도 “아버지, 그렇지 않아요.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니에요”라고 반박할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아버지가 무섭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때 우리 동네에는 교회에서 비롯된 연애 사건이 여럿 터졌다. 심지어 먼 친척뻘인 남녀가 교회에서 교제하다 가족들 눈을 피해 잠적한 일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엄격했던 유교 사회에서 교회가 아니면 젊은 남녀가 한자리에 앉을 수 있는 장소가 어디 있었겠나. 특히 진학의 기회를 얻지 못해 촌에 남은 청년들이 기독교라는 이국적이고 새로운 문화 속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데 이를 함께하는 이성이 좋아지지 않는다면 더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요즘 애들과 달리 그리 조숙하지 않았던 열여섯 살 나에게는 아직 연애란 먼 일이었고 교회는 내게 삶의 돌파구, 숨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이때는 이미 기독교 신앙의 기반이 잡혀 있었기 때문에 ‘가족의 박해가 심할수록 신앙을 지켜야 진짜 기독교인’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때문에 아버지가 ‘교회 금지령’을 내리셨어도 교회를 향한 내 마음은 쉽게 접히지 않았다. 특히 우리 집은 교회에서 가까웠다. 집을 나서 갈대밭을 끼고 우물을 지나 걸어가면 바로 교회였다. 찬송 소리가 집에 들려올 정도는 아니었지만 밤에 갈대밭 쪽을 바라보면 흔들거리는 불빛 사이로 사람들이 움직이는 그림자가 보였다. 그러니 교회에 갈 수 없는 날이면 마음이 그렇게 싱숭생숭할 수가 없었다.

때때로 아버지 몰래 집을 나서 교회에 가기도 했지만 넘어야 할 산이 있었다. 대문 옆 작은 방에 작은할머니가 계셨는데 귀가 밝으셔서 내가 나가는 기척만 들리면 장지문을 벌컥 열고 “야야, 동순이 연애당 간다아!” 하고 소리를 치셨던 것이다.

그러던 중, 집회가 열리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운 좋게 작은할머니에게도 안 들키고 나왔다 싶었는데, 교회에 들어서자마자 어머니가 쫓아 들어오셨다. “동순아! 큰일났다야, 시방 아부지가 너 붙들러 오신당게!” 나는 즉시 교회 문 밖으로 뛰쳐나가 갈대밭으로 숨어들었다. 곧 “이노무 가시내, 언능 못 나오나?” 하는 아버지의 호통 소리가 뒷덜미를 낚아 챌 듯이 쫓아왔다.

갈대밭 사이로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갈댓잎이 얼굴을 스쳐 생채기를 내고 숨이 가빠왔다. 아버지가 손에 들고 오신 게 부지깽이인지, 빗자루인지는 몰라도 거기 얻어맞을 게 무서워 그리 달린 것은 아니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문득 갈대밭 한가운데 멈춰 섰다. 숨을 몰아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나님, 제발 맘껏 교회 다니게 해주세요. 지금은 안 된다면 언제가 되든 그런 날이 오게 해주세요.” 그렇게 기도하는 나를 샛노란 달이 굽어보고 있었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