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변재운] 행복한 CEO 박종원

입력 2010-05-04 18:16

경제적 측면에서만 볼 때 우리나라가 ‘한강의 기적’을 이루면서 근대화에 성공한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기집권 덕분이라는 분석이 많다. 비록 민주주의는 희생당했지만 그가 18년이라는 긴 세월을 가졌기에 단기적 성과에 치중하기보다는 중화학공업 육성 등 시간을 요하는 경제정책들을 추진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일을 잘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지만 중책을 맡은 사람이 자주 바뀌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소신 있는 정책을 펴기도 어렵거니와 업무 파악하고 일 좀 하려면 임기를 마치기가 십상이다. 국제회의에 가보면 우리나라 대표만 매년 바뀌어 창피하다는 이야기도 있고, 기업에 있는 사람들은 주무부처 담당 국장이 너무 자주 바뀌어 애로가 많다고 푸념한다.

사정이 이런 것은 ‘나눠먹기’ 풍조 때문일 듯하다. 좋은 자리는 적당히 하고 후배들을 위해 내놔야 하는 것이다. 일을 잘하나 못하나 마찬가지다. 어찌 보면 인간적이지만 그보다는 편의주의적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수요자인 국민이나 소비자를 생각하기보다는 공급자, 즉 자기들만의 잔칫상이다.

미국 거대 기업 GE의 잭 웰치 전 회장은 20년 이상 CEO를 맡았고 2001년 바통을 이어받은 제프리 이멜트 회장도 10년째 기업을 이끌고 있다. 러시아 정치인 안드레이 그로미코는 30년 가까이 외무장관직을 맡았고, 필리핀의 장수 외무장관 알베르토 로물로는 차기 대선에서 야당 후보를 지지하겠다는 발언에도 불구하고 장관직을 굳건히 유지하고 있다. 오래 하는 게 꼭 좋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말 한마디 잘못하면 목이 달아나고, 그래서 이 눈치 저 눈치 봐야 하는 우리나라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코리안리 박종원 사장이 국내 금융업계 전문경영인으로는 최초로 다섯 번째 임기에 들어가게 됐다. 코리안리는 최근 이사회에서 오는 7월 임기가 끝나는 박 사장을 연임시키기로 의결했다. 공짜로 얻어진 게 아니다. 행시 14회 출신인 박 사장이 관직에서 나와 1998년 사장을 맡았을 당시 코리안리는 파산 직전의 부실덩어리였다. 그런 회사를 연평균 13%씩 성장시키며 아시아 1위 재보험사로 키워놓았으니 큰소리 칠만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이 너무 오래 하는 것 아니냐며 흔들기를 시도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주주와 직원들이 오히려 그를 지지하고 붙잡았다니 박 사장은 참 행복한 CEO다. 박 사장 같은 CEO가 많이 나오면 좋겠다.

변재운 논설위원 jwb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