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문받아 색다른 ‘청와대 옆 갤러리’
입력 2010-05-04 17:36
어디로 가십니까?”
“부암동 쪽이요.”
“네. 통과하세요.”
청와대 앞을 지나는 차량이나 행인들이 경찰의 검문 과정에서 주고받는 일반적인 대화다. 대부분이 청와대 앞길을 통해 다른 방향으로 가는 사람들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그랬다. 하지만 올들어 대화 내용이 달라졌다.
“어디로 가십니까?”
“청와대 옆 갤러리요.”
“네. 통과하세요.”
청와대 근처에 갤러리가 하나둘씩 늘어나면서 바뀐 풍경이다. 지난달 23일 청와대 춘추관 오른쪽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공근혜갤러리가 들어섰다. 삼청동에서 청와대 옆 팔판동으로 이전한 이 갤러리는 사진전문 화랑으로 경복궁 돌담과 청와대 앞 풍경을 전시작품과 함께 감상할 수 있다.
공근혜 관장은 “청와대 인근 화랑이라는 컨셉트를 살려 회화 조각 영상 등 다양한 장르를 폭넓게 소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현재 10곳에 달하는 청와대 옆 갤러리는 2008년 갤러리상이 춘추관 맞은편에 개관하면서 스타트를 끊었다. 검문소를 거쳐 청와대 앞을 지나는 길은 크게 세 가지다. 삼청동 입구에서 왼쪽으로 진입하는 길, 총리 공관 앞 삼거리에서 춘추관 방향으로 가는 길, 국립고궁박물관 정문을 지나 통의동으로 가는 길 등이다.
통의동 쪽에는 진화랑, 대림미술관 등이 있고 아트싸이드, 시몬 등 갤러리가 이곳으로 이전할 예정이다. 이곳 갤러리는 경찰의 검문을 거치지 않기 때문에 관람객의 출입이 자유롭다. 하지만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전시 오픈 행사 때는 사전에 참석 예상 인원 등을 경찰에 알려야 한다. 작품 운송 대형 차량이 드나들 때도 사전에 신고해야 한다.
총리공관 방향에는 김현주갤러리가 있고 삼청동 입구에는 갤러리인과 리씨갤러리가 들어섰다. 개관한 지 10년 가량 된 갤러리인은 검문소 바로 옆에 위치해 관람객의 통행이 불편할 수밖에. 그러나 전시를 보기위해 이 갤러리를 찾는 관람객들은 그런 수고쯤은 기꺼이 참아낸다. 양인 관장은 “검문소를 거쳐 갤러리를 찾아오는 과정을 재미있어 하는 관객도 많다”고 말했다.
갤러리인에서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리씨갤러리가 나온다. 지난해 말 이곳으로 이전한 리씨갤러리는 인왕산과 청와대 앞 경복궁이 바라다 보이는 전망 좋은 화랑이다. 그렇지만 청와대 근처에 갤러리가 있다보니 “대통령을 만나게 해달라”며 고함을 지르는 사람, “억울해서 못살겠다”며 분신자살을 시도하는 사람 등 갖가지 해프닝을 목격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청와대 옆에 갤러리를 짓는 일이 여간 까다로운 것은 아니다. 청와대 측에서 특별히 간여하거나 제재를 하지는 않지만 고도제한으로 4층 이상 건물을 올리지 못한다. 또 청와대 방향으로는 창을 내지 못한다. 청와대 내부가 내려다 보이는 옥상은 출입이 제한된다. 이승형 갤러리상 관장은 “건축허가 등 절차에만 1년이 걸렸지만 복잡한 인사동과 달리 청와대 주변의 조용한 분위기 덕분에 더 좋아하는 고객들이 많다”고 설명했다.
청와대 관람객들도 바로 옆에 갤러리가 있는 것을 보고 작품을 감상하러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공근혜갤러리 옆에는 청와대 관광버스 하차장이 있다. 하루에도 수 백명이 청와대를 관람하고 주변을 둘러보다 자연스럽게 갤러리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공근혜 관장은 “관람객들이 청와대 바로 옆에 갤러리가 있다는 사실을 신기해한다”면서 “청와대 관광뿐 아니라 미술작품도 감상할 수 있어 즐거워한다”고 전했다.
청와대 앞 통행은 오후 8시가 되면 금지된다. 이 시간 이전에 갤러리에 들어간 관객이 나오는 것은 자유롭지만 이후에 들어가려면 신분 확인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 지역 주민들과 갤러리 관계자는 경찰이 웬만큼 얼굴을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신분증 제시 등은 생략한다.
인사동 등 화랑 밀집지역에서 상대적으로 벗어난 외진 곳인데도 갤러리가 계속 늘어나는 이유는 작품거래를 주로 하는 단골 컬렉터가 조용한 공간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청와대 옆 갤러리에 호기심을 갖는 관객의 반응도 무시할 수 없다. 인사동 청담동 삼청동 일대에 이어 또 하나의 미술동네로, 북촌의 새로운 문화명소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