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감독 ‘시’ 주연으로 16년만에 스크린 복귀 윤정희

입력 2010-05-04 17:29


“표정으로 담아내는 연기 절제된 단어로 의미 함축하는 詩와 같지요”

배우 윤정희(66)가 16년 만에 ‘시’로 스크린에 돌아왔다. 최근 아담한 한옥 지붕이 손에 잡힐 듯 내다보이는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창가에 바투 앉은 그는 방금 막 영화 스크린에서 빠져나온 사람처럼 느껴졌다. 한 시간 가량 진행된 인터뷰에서 그는 ‘시’에서 연기를 한 것이 아니라 한 편의 시를 남겼음을 담담한 말투로 전했다.



“왜 16년이나 걸렸을까.” 가장 궁금한 질문이었다. 그는 “배우 윤정희의 배우생활을 아끼고 싶었다”고 말했다. “연기가 하고 싶다고 서두르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요. 어느 배우가 좋은 작품을 안 하고 싶겠어요. 배우의 자존심이죠. 나쁜 작품은 안 하겠다는 거예요.”

마음이 움직이는 작품을 찾기까지 16년을 기다린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젊음은 사라지고 있지만 그의 표정에는 조금의 초초함도 비춰지지 않았다. 정말 좋은 작품이라는 확신이 없었다면 관객은 아직도 윤정희를 스크린에서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윤정희가 ‘시’에 확신을 가진 것은 이창동 감독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영화제 등에서 몇 번 마주친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데 어느 날 이창동 감독이 저녁식사에 윤정희와 남편 백건우를 초청했다. 이 감독은 “선생님을 생각하고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데 말씀을 안 드려 마음이 무겁다”고 했다. 윤정희는 너무 반가웠다. 그동안 수많은 시나리오가 왔지만 보지도 않았던 그였다. “스토리나 주제는 묻지도 않았어요. 영화인으로도 인정하지만 인간 이창동에 대한 신뢰가 있었어요. 막상 시나리오를 받고 보니 더 좋았어요. 미자라는 인물이 참 매력이 있었거든요.”

미자는 60이 넘은 나이에도 소녀 같은 순수함을 간직한 여자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모자를 쓰고 다니고, 꽃을 아주 좋아하는 엉뚱한 성격의 인물이다. 생활보호대상자로 보조금을 받고, 간병일을 하면서 혼자 손자를 키우는 미자는 어느 날 우연히 문화센터에서 시 강좌를 듣게 되면서 일상을 새롭게 조명하게 된다.

이창동 감독은 “시가 죽어가는 시대에 시를 쓴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질문을 하고 싶었다”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 그리고 미자를 통해 그 의미를 풀어낸다.

미자는 시 쓰는 게 어렵다. 시를 쓰려면 사물, 현실과 대화하듯 관찰하고 바라봐야 하지만 미자는 그럴 수 없다. 마을에서 일어난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의 가해자 중 하나가 자신의 손자이기 때문이다. 아무 일 없다는 듯 행동하는 손자와 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덮으려고 하는 가해자 아버지들 사이에서 미자는 괴로워한다. 손자가 밥 먹는 모습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미자는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는 게 힘들다. “큰 사건 앞에서 혼자 고통 받는 미자는 착하다고 얘기할 수도 있어요. 딸에게도 알리지 않고 손자에게도 직설적으로 얘기하지 않죠. 이런 여자가 시를 쓰려고 노력하는 모습은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있어요.”

‘시’에서는 음악이 일절 사용되지 않는다. 음악을 통해 감정을 인위적으로 끌어내기보다 배우의 연기를 통해 담담하면서도 깊이 있게 메시지를 전한다. 마치 절제된 언어의 시가 큰 울림을 주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 중심에는 영화 전체의 90% 이상에 등장하며 열연한 윤정희가 있다. 그는 “오랫동안 영화에 출연했지만 이런 인물은 처음이었다. 고민하는 모습도, 강하게 표현되는 것도 아니고 쉽지 않았다”라면서 “미자의 성격이 저와 비슷한 점이 많아서 그 속에 빠져들기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표현하는 건 어려웠다”고 털어놨다. 윤정희는 “영화가 끝났는데 미자의 모든 모습이 떠나질 않는다”고 인물에 대한 깊은 여운을 드러냈다.

“긴 대사와 지문을 보고 그것을 한 가지 표정으로 담아내야 하는 연기는 시상을 찾고 절제된 단어로 의미를 함축하는 시를 쓰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요.” 영화 내내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 윤정희는 ‘시’가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소회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 상을 타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그런 영화제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배우에겐 큰 영광이겠지요. 하지만 그보다 먼저 우리 관객들이 ‘윤정희가 연기를 참 잘했다’는 마음을 가지는 게 나에겐 더 중요합니다.”

김준엽 기자 snoop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