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설동순 (3) 교회에서 만큼은 부엌데기가 아니었다
입력 2010-05-04 20:12
봄꽃은 흐드러지게 피는데 날씨는 영 더워지지 않는다. 전라도 말로 이렇게 ‘춥도 덥도 안 한 날’이면 나는 어려서 어머니가 해 주시던 생선조림이 간절히 그리워진다. 탕이나 국은 후텁지근하고, 그렇다고 냉국이나 비빔국수 먹기는 이른 요즘 같은 때 딱 맞춤한 밥반찬이기 때문이다.
어릴 때, 바다에 접하지 않은 순창에서는 생선이 참 귀한 음식이었다. 고등어자반과 말린 북어 정도가 내가 맛볼 수 있는 생선들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내 입에는 그 두 생선이 제일 맛있다. 어머니가 가끔 광에서 꺼내 와 물에 불려 졸여 주셨던 북어는 씹을수록 매콤하면서 고소했고, 장에 다녀오신 날 말린 무와 고구마 줄기를 넣고 해 주셨던 고등어조림은 구수하면서 얼큰했다. 지금도 한 젓가락 입에 넣었을 때 입 안 가득 퍼졌던 행복함까지 고스란히 떠오르는 추억의 음식들이다.
우리 부모님께서는 땅도 재산도 하나 없이 빈손으로 살림을 시작하셨다. 나보다 열여섯 살 많은 오빠를 키우실 때는 마을마다 다니며 손으로 짠 광주리를 팔아야 할 정도로 빈한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부모님은 오빠를 최선을 다해 가르치셨고, 나중에 내 뒤로 얻은 남동생들도 하는 데까지 교육시키셨다. 그러나 그 가운데 낀 나에 대해서는 전혀 공부를 시킬 의지가 없으셨다. 그 시대가 다 그렇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는 “시집가면 너므 집 사람 될 가시내를 뭣 헌다고 가르친다냐”하는 부모님의 말이 그렇게 서운하고 원망스러울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나무를 잔뜩 긁어 머리에 이고 친구들과 논둑길을 걸어가다 교회 전도사님과 마주쳤다. 우리집에서 가까운 금과면 중앙교회에 부임해 오신 전도사님이셨다.
“너희들, 교회 안 나올래? 맛난 것도 주고, 재미있는 찬송도 갈켜 주고 헐 틴디.” 모르긴 몰라도 그때 우리들의 얼굴에서는 빛이 났을 것이다. 그 시절 그 시골에서, 우리에게 그런 제안을 해 온 사람은 전에도 후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부터 친구들과 나는 교회에 나갔다. 지금처럼 아동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주일 오후 교회 옆 작은 방에 둘러앉아 건빵이나 떡을 얻어먹으며 노래 부르고 율동한 게 전부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한 시간이었다. 나를 ‘집안일 돕는 일손’이 아닌 한 명의 어린이로 대해 준 것은 그 시간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되돌아보면 ‘복음’에 대한 깨달음은 없었다. 솔직히 먹을 것 주고, 노래 가르쳐 주니까 마냥 좋았던 것뿐이다. 그러나 그때 교회 다닌 경험은 평생 내 신앙의 기반이 됐다. 특히 그해 어느 날 다른 교회 장로님이 오셔서 가르쳐 주신 찬송 하나가 오래도록 남았다.
“이 세상은 나그네 길 나는 다만 나그네 나의 집은 저 하늘 저 넘어 있고 천사들은 하늘에서 날 오라고 부르니 나는요 이 땅에 있을 맘 없어요.”
이 찬송을 부를 때 나는 마음속에서 뭔가 덜컥 하고 떨어져 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다가 아니구나. 나도 다른 세상을 살 수 있구나’하는 깨달음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내 안 깊은 곳으로 스며든 그 깨달음은 이후로 살면서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떨쳐 일어나게 해 준 큰 힘이 됐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