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화 和色·유로화 死色… 화폐전쟁 서막
입력 2010-05-03 21:34
“화폐를 통제하는 자가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베스트셀러 서적 ‘화폐전쟁’의 문구는 현실에서도 유효하다. 저자 쑹훙빙(宋鴻兵)의 조국인 중국이 화폐전쟁의 전장에 뛰어들 채비를 갖추면서 외환시장이 요동치고 있다.
19세기 영국 런던과 20세기 미국 뉴욕을 넘어 21세기의 금융 패권을 거머쥐기 위한 총성 없는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지금 전 세계가 목격하고 있는 그리스의 몰락과 유로존(유로화 사용 16개국)의 위기는 금융 맹주를 차지하기 위한 새로운 화폐전쟁의 서막에 불과하다.
◇떠오르는 위안화=월스트리트저널(WSJ)은 3일 아시아판 1면 기사로 달러화 패권에 맞설 라이벌로 중국 위안화가 각광받고 있다고 전했다. 중국이 위안화의 고정환율을 풀 조짐을 보이면서 아직 무대에 오르지도 않은 사회주의 국가의 화폐가 이미 외환시장을 뒤흔들고 있다는 것이다.
WSJ는 올 들어 한국의 원화가치가 5% 상승하고, 말레이시아 링기트(7.5%), 인도 루피(5%) 등 아시아 통화가 동반 강세를 보이고 있는 건 ‘차이나 이펙트(위안화 절상 기대 심리)’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위안화가 외환시장에 거래되면서 가치가 상승해도 중국의 수출 경쟁력은 끄떡없을 것이고, 아시아 경제가 동반 성장할 것이라는 기대가 더 크다는 것. 여기에 중국에 원료를 공급하는 브라질 호주 캐나다의 화폐도 달러화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위안화를 따라갈 조짐이 있다고 WSJ는 전했다.
대만과 홍콩에서는 위안화 품귀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위안화 절상이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개인과 기업은 물론 금융회사들까지 위안화 사재기에 뛰어들고 있기 때문이라고 홍콩 명보(明報)가 최근 보도했다. 영국 런던 HSBC의 외환시장 분석가 데이비드 블룸은 WSJ와의 인터뷰에서 “지금까지는 달러화가 지구의 중심이었지만 위안화의 힘이 작동하면서 중국의 영향력이 막강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힘 잃은 유로화=불과 몇 해 전까지 만해도 달러 패권에 맞설 유일한 대안은 유로화였다.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은 은퇴 직전인 2007년 “유로가 달러를 대체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1999년 출범 당시 1유로=1달러로 시작한 유로는 2008년 1유로=1.6달러까지 가치가 치솟았다. 달러화를 제치고 외환시장에서 가장 많이 통용되는 화폐(동전 포함) 지위에 오르기도 했다.
유로화의 추락을 부른 건 지나친 패권 추구였다. 화폐전쟁의 승리를 위해 유로존을 무리하게 확장하고 유럽 금융회사들이 파생상품 투자에 뛰어든 게 화근이었다. 통화 발행권은 유럽중앙은행(ECB)에 두고 재정권은 각국이 쥐고 있는 기이한 시스템도 위기를 키웠다.
금융산업을 집중 육성한 아일랜드와 국채 발행을 남발한 그리스가 가장 먼저 직격탄을 맞았다. 다른 유로존 국가로 위기가 확산될 기미다. 아랍에미리트연합 영자지 더내셔널은 3일 “세계 통화가 되고자 했던 유로의 야심은 보류됐고, 달러가 왕좌를 지켰다”며 “유로는 벌거벗은 임금일 뿐”이라고 조롱했다.
◇화폐전쟁 개전 임박=달러의 반격에 앞장선 사람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다. 그는 지난 3월 뉴욕타임스(NYT) 칼럼에서 “미국 국채를 사들이는 투자자가 있는 한 미국의 국가 부채는 문제가 안 된다”며 “설사 중국이 미국 국채를 파는 어리석은 행동을 해도 달러를 찍어서 되사면 그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나아가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로존도 아직 전장에 머물고 있다. 헤르만 판 롬파위 유럽연합(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유로화 재건을 위해 ‘경제 정부’ 창설을 제안했다고 WSJ가 3일 전했다. 독일과 프랑스가 적극 나선다면 유로존은 ‘부도가 나지 않는 경제권’의 명성을 빠르게 회복할 수 있다.
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