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설동순 (2) 힘겹던 열 살 때 논둑 길서 ‘믿음’과 첫 대면

입력 2010-05-03 17:33


“죽으면 썩어질 노무 손목댕이, 뭐 한다고 놀린다냐! 언능 뛰어 들어오니라!”

어려서 대문 밖에서 친구들하고 잠시라도 놀고 있자 하면 어김없이 어머니의 이런 호통이 들려오곤 했다. 4남매 중 외동딸, 게다가 오빠와는 열여섯 살이나 차이 나는 둘째로 태어난 나는 맏딸 역할을 톡톡히 해야 했다.

그 덕에 어릴 때부터 어머니 음식 솜씨를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지금 생각하면 다행한 일이다. 어머니는 동네에서도 얌전하고 솜씨 좋기로 소문난 분이셨다. 그 당시는 어느 집이나 그랬겠지만 순창 고을 사람들은 다 집집마다 고추장을 정성들여 담갔다. 다른 고장 사람들이 보기에는 맛이 비슷할지 몰라도 우리가 볼 때는 앞집 뒷집 옆집 고추장 맛이 다 달랐다. 어느 집 것이 맛있느냐 질문은 별 의미가 없다. 내 입엔 우리 집 고추장이 제일 착착 붙고, 친구 입에는 그 집 고추장이 감칠 맛 날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도 어쨌든 우리 집 고추장은 근동에서 맛있다는 말을 들었다.

고추장은 메주가루와 고춧가루를 넣기 전 기본이 되는 재료를 어떤 형태로 하느냐를 기준으로 세 가지 만드는 방법이 있다. 밥으로, 떡으로, 밥에다 엿을 합쳐 쓰는 방법. 이렇게 세 가지다. 요즘은 떡을 기계로 뽑아서 만드는 방법과 시판용 엿기름으로 만드는 방법이 손쉽기 때문에 많이 쓰인다. 그러나 내가 볼 때 맛이 제대로 나는 전통 재래식 방법은 찹쌀이나 보리쌀로 밥을 해서 아랫목에 띄워서 만드는 방법이다. 내가 어릴 때는 거의가 이렇게 했고, 나는 지금도 이 방법을 고수하고 있다.

어머니는 매년 음력 11월쯤 되면 쌀 두어 말로 고추장을 담그셨다. 쌀을 끓일 때 아궁이 옆에 지켜 서서 나무 주걱으로 젓는 일은 내 몫이었다. 그럴 때면 왜 그렇게 부엌 밖으로만 마음이 향했는지 모른다. 나는 친구들보다 2년 늦은 열 살에야 학교에 들어갔는데 친구들이 학교에 있을 시간이면 일하는 게 더 싫었던 생각이 난다.

고추장 만드는 일은 이틀이 꼬박 걸렸다. 어머니는 중간중간 나에게 간을 보게 하셨다. “한꺼번에 간을 했다가 짜게 되면 1년 장맛 다 망친다”면서 신중하게 간을 해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이도록 말씀하셨다. 그런데도 나중에 처음 고추장 사업을 시작할 때도 어머니께서는 일을 도와 주시면서 이 말씀을 하고 또 하셨다. 나도 아마 딸들에게 고추장 비법을 전수할 때면 이 말을 하고 또 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어머니와 함께 일하는 시간은 나은 편이다. 예닐곱 살부터 동이에 물을 이어 나르고, 할머니를 따라 산에 다니며 갈퀴로 나무를 긁어모으는 일도 매일 해야 했다. 보리쌀로 밥을 하기 위해 함지박만한 작은 절구인 ‘합독’에 보리쌀을 가는 일도 매일 하지만 늘 힘겨웠던 일들이었다.

그렇게 별다른 재미라고는 모르고 살아가던 내 어린 시절에 큰일이 일어났다. 나에게는 일생일대의 크나큰 일이었다. 바로 전도를 받은 것이다.

열 살 때였다. 친구들과 나무를 이고 논둑길을 걸어가는데 말쑥한 차림의 남자 어른이 맞은편에서 다가왔다. 우리는 순간 경계를 했지만 “나는 저그 교회에 새로 부임해 온 전도사란다”라는 말에 우리의 눈은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황세원 기자 hws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