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설동순 (1) “맵고도 달큰한 게 세상살이 맛이제”
입력 2010-05-02 17:23
5월이면 머위장아찌를 담글 때다. 머위는 쌉싸래한 맛이 일품인데 고들빼기하고는 또 다른 은근한 쓴 맛이다. 잎이 너무 퍼지지 않은 놈으로 골라서 깨끗하게 다듬은 다음에 소금에 사나흘 절이고, 다시 씻어서 물기를 완전히 뺀 다음에 고추장에 박아 놓으면 머위 고추장 장아찌가 된다. 고추장을 충분히 흡수했을 때 새 장으로 바꿔주기를 대여섯 번 해야 제 맛이 나는데 마지막 고추장을 넣을 때 물엿을 약간 넣어 버무리면 좋다.
잘 익은 머위장아찌를 꼭꼭 씹으면 별의별 맛이 다 난다. 첫맛은 맵지만 곧 머위 본연의 쓴 맛이 혀 위에 퍼지고, 소금에 절인 채소 특유의 짠 맛이 씹을 때마다 배어 나오다가, 잘 익은 고추장 특유의 달큰함이 마지막으로 온 입에 퍼진다. 그 맵고도 쓰고도 짜고도 단 맛이란.
나는 고추장이 좋다. 깻잎 오이 두릅 마늘 더덕 도라지 고들빼기 매실 감 굴비 등 어떤 것을 담가도 맵고도 달큰한 맛으로 감싸 안아 감칠맛 나는 장아찌로 만들어 준다.
산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다. 갖은 재료가 고추장 장아찌로 되는 과정과도 같다. 내가 장아찌 재료라고 한다면 나에게 고추장은 예수님이시다. 처음 교회 다니기까지 어려움도 많았고, 그 이후로도 신앙생활에 조금이라도 허점이 보인다 하면 예수님은 당장 고초 당초보다 매운 시련을 주신다. 그 시련을 겪어내고 나면 쓰고 짠 인생사는 부드러워지고 달콤함만 남
는다.
한때는 입버릇처럼 “사는 게 왜 이리 힘들까” 주절거리기도 했었다. 가난해서 2∼3일에 한 끼밖에는 밥을 못 먹던 시절에 늘 그랬다. 그러나 지금은 “나맨치로 재미지게 사는 사람이 누가 있을 거여” 하는 말이 시시때때로 나온다.
못살던 그때 입맛을 잃은 뒤로 지금도 먹는 재미를 별로 못 느끼지만, 대신 다른 재미가 많다. 맛난 고추장 담가 사람들에게 먹이는 재미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가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어줄 때, 그리고 그로 인해 그들과 더 가까워질 때, 그 재미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내가 태어나 살아 온 고장 순창은 섬진강 상류에 자리해 물 맑고 맛 좋은 채소들로 유명하다. 여러 음식 중에서도 고추장이 이름났다. 고추 농사 하기에도, 장이 숙성되기에도 가장 좋은 기후와 조건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 까닭에 내가 어릴 때도 집집마다 고추장을 직접 담그는 것은 물론, 알음알음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조금씩 파는 집들이 있었다. 물론 대부분 사람들은 “뭣 헌다고 돈을 받는디야” 하면서 그냥 싸주곤 했지만 말이다.
그런 환경에서 자랐지만 내가 이렇게 평생 고추장 덕을 보고 살 줄은 몰랐다. 고추장을 팔아 자식들 키웠고, 교회를 섬기고 선교할 수 있었고, 고추장 파는 사람 중에 신앙이 좋다는 이유로 국민일보 비전클럽 회원이 됐고, 거기서 귀중한 인연을 맺고 소중한 신앙의 친구들을 수도 없이 만났다.
그러나 어린 시절 나에게는 그런 미래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가난한 농가의 4남매 중 둘째, 홍일점으로 태어난 나는 꿈이 일절 허락되지 않는 환경을 원망하며 자랐다.
◇약력=1952년 1월7일생 / 1991년 순창전통고추장 제조 기능인 지정 / 현 ‘순창전통별미고추장’ 대표, 순창읍교회 권사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