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 46용사 영결식] “당신을 이렇게 보낼수 없다” 유족들 눈물바다
입력 2010-04-29 21:42
평택 영결식 표정
고 남기훈 원사의 장모 이춘자(63)씨는 28일 밤새 옷을 다렸다. 다음날 아침이면 딸과 두 손녀가 남편과 아버지를 떠나보내는데 구겨진 옷을 그대로 입힐 순 없었다.
29일 오전 딸 지영신씨의 휴대전화를 대신 받은 이씨는 “마지막 길인데 잘 배웅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깔끔한 차림으로 남 원사를 보내라고 챙겨줬다”고 했다. 잠시 후 천안함 희생자 합동 영결식이 열렸지만 이씨는 식장에 가지 않았다. 차 안에 남아 손녀들을 돌보고 있었다.
“어제는 화장하는데 비가 와서 마음이 무거웠다오. 오늘은 다행히 비가 오지 않아서 사위가 편안히 하늘로 올라갈 것 같구려. 이제 열심히 잘 살아 가야 하지 않겠소. 남 원사를 가슴에 담고 말이지.”
영결식은 오전 10시부터 1시간 동안 경기도 평택 해군 제2함대사령부 안보공원에서 열렸다. 화창해도 바람은 차가웠다.
이명박 대통령이 국화에 둘러싸인 46명의 영정 아래 일일이 화랑무공훈장을 놓았다. 이 대통령은 조사까지 낭독하고 싶었지만 해군장인 만큼 해군에 맡겼다고 청와대 관계자는 전했다. 김성찬 해군참모총장과 천안함 생존자 김현래 중사가 각각 조사와 추도사를 읽었다.
곳곳에서 흐느꼈다. 유족은 대부분 고개를 들지 못하고 어깨만 들썩였다. 거친 머리칼이 바람에 날려 헝클어졌다. 아이들도 울먹였다. 고 김태석 원사의 두 딸 해나양과 해강양은 엄마 이수정씨에게 안겨 얼굴을 파묻었다. 고 김경수 상사의 아들은 팔을 뻗어 엄마의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아 내렸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개역개정판 고린도전서 15장 51∼52절)
기독교 의식에서 부활의 말씀을 읽은 군목 유영승 목사는 “사랑하는 가족을 나라에 바치고 애통하는 가족과 우리에게 평안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했다.
희생자마다 유족 2명씩 나가 영정 앞에 꽃을 올리고 향을 피웠다. 유족들은 참던 눈물을 쏟으며 통곡했다. “이렇게 보낼 수 없다”며 울부짖었다. 고 민평기 상사의 할머니는 영정이 놓인 단상에 얼굴을 파묻고 오열하다 쓰러졌다. 고 정범구 병장의 어머니 신복섭씨는 비틀거렸다. 아이들도 울음을 터뜨렸다. ‘님이시여’를 합창하던 수병 몇몇도 글썽였다. 유족들은 한참 동안 영정 앞을 떠나지 못했다.
헌화와 분향을 마치자 수병 9명이 격식을 갖춰 조총을 쐈다. 부대 안 수리 군항에 정박한 함선들이 뱃고동을 울렸다. 운구 행렬이 시작됐다. 천안함 생존자들이 희생자들의 영정과 위패를 안고 태극기와 해군기를 뒤따랐다. 한 장병은 눈을 찡그리더니 이내 눈물을 흘렸다. 영정을 옮겨 싣고 유족을 태운 차량은 부대를 한 바퀴 돌았다. 유족들은 군항에 정박한 배와 바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오후 12시50분쯤 고 심영빈 중사의 아버지 심대일씨는 국립대전현충원으로 가던 중 잠시 휴게소에 들렀다. “영결식 내내 숨을 죽이고 있었어요. 아무 생각도 안 들더라고요. 아들을 잃고, 이제 떠나보내려는데 무슨 말이 있고 생각이 있겠습니까.” 심씨는 “아들과 동행하는 마지막 길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다”고 했다.
고 김태석 원사의 처남 이용기씨는 영결식을 치르는 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고 전했다. “매형이 편안히 쉬길 바라며 추모하는 마음으로 앉아 있었어요. ‘좋은 곳에 가겠지’ 하면서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서글펐습니다.” 기자와 통화한 유족들은 어조가 한결같이 애잔했다. 슬프고 답답한 심정에 뭔가 말하고 싶지만 미처 다 쏟아내지 못한 듯했다.
평택=강창욱 노석조 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