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전병욱 삼일교회 목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루라

입력 2010-04-29 21:57


46명의 천안함 용사를 눈물로 보냈다. 하늘에서도 비가 내렸고, 우리의 마음속에도 슬픔의 비가 내렸다. 떠난 사람이 있고, 남은 사람이 있다. 이제 남은 사람의 책무는 무엇인가.

공포와 동정은 같은 뿌리

첫째, 공포로 반응해서는 안 된다. 사람이 불행과 고난을 당할 때 느끼는 감정은 ‘공포’와 ‘동정’이다. 내게 다가오는 위험을 감지할 때 공포를 느낀다. 다른 사람이 당하는 위험을 감지할 때 동정을 느끼게 된다. 공포와 동정은 사실 뿌리가 같은 감정이다. 아이티에서 대지진이 일어났다. 우리나라에는 지진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으면 안도와 동시에 동정하게 된다. 슬픔을 느끼지만 나의 위험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도 지진이 일어나 아이티같이 될 수 있다고 느끼면 공포에 사로잡힌다. 일본, 미국 캘리포니아, 대만에서의 반응이다.

공포로 반응하는 것이 위험한 이유는 무엇인가. 일단 공포에 붙들리면 남이 보이지 않는다. 오직 나만 살겠다고 아우성친다. 공포는 사람을 이기적으로 만든다. 전쟁이 왜 잔인한 것인가. 전쟁은 나에게만 집중하게 만든다. 남의 고통은 외면하게 된다. 전쟁은 죽음과 파괴를 가져오는 잔인한 것이지만 인간성 파괴가 가장 큰 고통으로 남는다.

공포로 인한 반응에서 얻을 것은 없다. 독재국가에서 공포정치를 한다. 몇 명 모이기만 해도 잡아가고, 입에 재갈을 물린다. 왜? 강해서가 아니다. 두렵기 때문이다.

둘째, 얻은 유익을 선용해야 한다. 이번 천안함 문제를 통해 국가 방위와 국가 시스템, 국민의 자세 등 여러 가지 약점이 한꺼번에 드러났다. 천안함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정보가 노출된 것 아니냐는 우려의 말들이 있다. 그러나 얻은 것도 많다. 우리의 약점이 드러났다는 것은 보완해야 할 내용을 알게 됐다는 뜻이다. 치밀하게 보완하면 약이 될 수 있다. 동시에 이제까지 모르는 대적의 공격 방법을 알게 됐다는 것은 분명 큰 유익이다.

5000명의 병력을 5만명같이 쓸 수도 있고, 5만명의 병력을 5000명같이 쓸 수 있다. 적이 모르는 매복의 힘을 활용할 때다. 대적이 모르는 매복의 힘을 사용하면 10배의 능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노출된 힘은 10분의 1로 감소될 수밖에 없다. 상대의 매복의 힘을 이번 계기로 노출된 힘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런 점에서 얻은 것도 적지 않다.

그래도 붙들어야 할 꿈

건강하고, 자원이 풍부한 쪽은 시간이 편들어 준다. 보완하고, 회복하는 속도가 상대에 비해 몇 배 빠를 수 있다. 치밀한 후속 조치만 있다면 결국 손해 보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다. 현실성을 잃고, 막연히 기대했던 일들에 대해 냉철하게 다시 생각해야 한다. 올바른 대응이 따른다면 이번 사태가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것이다.

어둠속 희망을 바라봐야

셋째, 그래도 꿈을 붙들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분단 해소, 평화 통일에 대한 꿈이 있다. 아무리 현실이 어렵고 잔혹하더라도 이 꿈마저 버릴 수는 없다. 비극은 우리의 눈을 좁게 만든다. 슬픔은 꿈을 잠시 망각하게 한다. 아파도 힘들어도 통일에 대한 꿈을 다시 붙들어야 한다.

한경직 목사님 소천 10주년이 됐다. 한경직 구술 자서전이 나왔다. 제목이 ‘나의 감사’였다. 80세 나이에 구술로 자신의 일생을 정리한 것이다. 목사님의 인생을 한 마디로 묘사하면 무엇일까. 바로 ‘감사’다. 인생 전체를 감사로 풀어냈다. 낳아주신 부모님께 감사한다, 평생의 동반자인 아내를 주심에 감사한다, 선교사를 보내주셔서 예수 믿게 하심에 감사한다라는 식의 접근이다. 목사님의 아버지가 12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큰아버지는 물려받은 재산을 방탕하게 다 날려버렸다. 자연히 목사님 가정도 어렵게 되었다. 원망이 있어야 할 상황이다. 그런데 그때 ‘자고로 사람은 술을 마시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그걸 깨닫게 하심에 감사한다는 것이었다. 망치로 한방 맞은 기분이었다. 시작부터 이런 식의 감사로 인생을 풀어가니 풀리지 않는 것이 없었다.

우리가 접한 비극도 꿈이라는 키워드로 풀어야 한다. 통일의 꿈으로 풀면 그리 절망적이지 않다. 새벽이 오기 전에 어둠이 깊다고 한다. 짙은 어둠에서 새벽의 희망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꿈은 꾸지만 준비하지 못한 것들이 많았다. 이번 사태가 꿈에는 반드시 준비하는 대가를 치러야 함을 상기시켰다. 북쪽을 가리키는 나침반은 무엇이 그리 두려운지 항상 바늘이 떨린다. 떨리지만 자신의 사명인 북쪽을 가리키는 일은 중단하지 않는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다 알고 가는 길이 아니다. 모두 확신 속에 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약속, 그리고 민족에게 주신 꿈만은 잔혹한 현실 속에서도 잊지 말고 붙들어야 한다. 사는 게 힘들다. 떨리는 인생을 산다. 떨려도 조용한 묵상 이후에 언제나 북쪽을 가리키는 나침반처럼 우리의 꿈이 보여주는 방향을 잃어서는 안 될 것이다. 바울도 떨림 가운데 사명의 꿈을 잊지 않았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전병욱 삼일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