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코너-김명호] 자화자찬은 이제 그만
입력 2010-04-29 18:16
“유사 이래 가장 국운이 상승 중이다.” “국제회의에 많이 참석해봤지만, 지금처럼 위상이 높았던 적은 없었다.”
지난 주말 워싱턴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 회담이 끝난 뒤, 몇몇 정부 고위당국자들은 이렇게 소감을 얘기했다. 틀린 말이 아니다. 회담 결과인 코뮈니케는 우리가 사전에 만든 것이다. 이렇게 큰 국제 다자회의에서 문안부터 우리 손으로 만들어 관련국들에게 돌리고, 다시 수정해 최종 결과물까지 도출해낸 건 처음이기 때문이다.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는 이를 “국제적 룰세터(rule setter, 규칙을 만드는 사람)에 들어선 것”이라고 요약했다. 그동안 국제회의에서 어떤 규칙이나 질서가 만들어질 경우 우리 생각을 진중하게 물어보는 강대국도 없었고, 우리가 적극 제시하지도 못했다. 그저 우리는 그런 움직임이 있으면 그 내용을 취재하기에 급급했다. 한 당국자는 “그동안 받아쓰기만 하다가 직접 작성하려고 하니 지식이 모자랄 정도”라고 표현했다.
우리보다 선진국인 네덜란드의 재무장관은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에게 머리를 숙이며 아쉬운 소리를 해야 했다. 오는 11월 서울 G20 정상회의에 꼭 초청해 달라는 취지였다. 네덜란드는 G20 국가가 아니어서 의장국이 초청해야 옵서버 자격으로 참석할 수 있다. 스페인 재무장관도 회담 내내 윤 장관에게 밝은 미소로 인사했다. 스페인은 G20 국가는 아니지만 우리가 막후에서 도와줘 영구적으로 참석 자격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글로벌 경제의 틀을 짜는 회담에서 우리가 의제를 설정하는 등의 역할을 하고 있으니 국운상승기라 할 만하다. 기획재정부 장관이나, 한국은행 총재가 G7 국가 재무장관, IMF 총재, 세계은행 총재를 몽땅 만나는 일도 전에 없던 일이다.
바로 직전 워싱턴에서 열렸던 제1차 핵안보정상회의에서 2012년 2차 회의를 유치한 것도 한국의 위상 변화를 느끼게 했다. 50여개국 정상이 서울에 모인다는 것 자체가 그렇다. 2차 핵안보정상회의는 러시아가 국내 선거와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를 이유로 난색을 표한 뒤 프랑스와 일본이 막후에서 개최를 강력히 희망했다. 물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지지가 있었지만 결과적으론 우리가 두 강국을 제치고 회의를 서울로 가져온 셈이다.
최대 글로벌 이슈인 핵안보와 경제 두 분야의 ‘프리미엄 포럼’을 한국에 유치한 걸 두고 ‘국격이 높아졌다’거나 ‘국제사회에서 주도적 위치로 올라섰다’는 표현은 틀리지 않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자. 우선 안보 문제. 천안함 침몰 원인이 북한 소행인 것으로 드러났다고 치자. 피해 당사국임에도 우리 의지대로 할 수 있는 대응은 별로 없다.
군사적 제재는 물론 유엔 안보리 회부도 미국이 적극 밀고 중국이 반대하지 않아야 성사된다. 추가 대북 제재는 좀 더 어려운 과정이다. 북핵 문제는 미·중의 의도가 결정적이다.
경제 문제는 미국과 중국(G2)의 팽팽한 기싸움에 눈치를 봐야 한다.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유럽 국가들의 견제도 심하다. 우리는 그런 불안정한 구도 속에 서 있고, 우리의 이해가 열강들과 결코 일치하진 않는다.
이번 주초 세계은행 포럼 참석차 워싱턴에 온 전광우 국민연금공단이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연금 규모가 크다 보니 국제금융시장에서 ‘갑’의 위치에 서게 됐다. 위상이 높아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말을 조금만 민감하게 하면 다른 나라 언론들이 아주 비꼬아 보도하더라.” 위상이 높아지니 견제가 많다는 얘기다. 그만큼 조심해야겠다는 취지였다.
워싱턴에서 벌어진 다자회의들을 보면서 국격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을 느낀다. 그런데 이를 드러내놓고 강조하는 건 좀 차원이 낮은 홍보 전략인 것 같다. 오히려 긴장하며 내실을 다질 때이다. 오늘부터 ‘국운 상승’이니, ‘국격’이니 하는 표현이 청와대에서부터 나오지 않길 바란다. 위상에 맞게 대접은 받아야겠지만, 돈 좀 번다고 동네방네 떠들면 이웃들의 시선이 좋을 리 있겠는가.
워싱턴=김명호 m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