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용의 공간 너머] 봉수 파발 전보

입력 2010-04-29 18:00


연산군의 대표적 폭정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 ‘금표(禁標)’ 설치다. 그는 서울 주변 산기슭의 인가를 모두 헐고 사람들이 산에 출입하지 못하도록 했다. 가까운 곳에서 군사훈련 명목으로 사냥을 즐기기 위해서였다. ‘금표’란 출입금지 구역을 표시한 표목(標木)을 말한다.

연산군 10년, 병조판서는 “봉수꾼이 남산에 출입할 때에도 허가증을 내 주어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연산군은 “변방에 일이 생기면 급히 달려와 보고하면 되는데 봉수가 무슨 소용이냐”고 되묻고는 바로 봉수제(烽燧制)를 폐지했다. 연산군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이 한 일을 모두 뒤집었다. 그가 왕이 되자마자 한 일 중 하나가 바로 봉수제를 복구한 것이었다. 그러나 중종 5년에 ‘삼포왜란’이 일어났는데도 남산의 봉수대는 잠잠했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것은 빛이다. 빛을 이용한 정보 전달 방식인 봉수제는 상세한 정보를 전달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으나, 긴급 사태를 알리는 데에는 이보다 나은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이론과 실제는 많이 달랐으니 봉수제가 제 기능을 다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봉수제를 복구한 중종은 여러 차례 운영 실태를 점검했지만, 결과는 언제나 만족스럽지 않았다.

봉수꾼도 사람이다. 짚신 신고 높은 산꼭대기까지 오르내리는 일, 봉수대 옆에 나뭇단 쌓아 놓는 일, 큰 비가 내린 뒤 무너진 봉수대를 수리하는 일, 눈 내린 다음날 봉수대에 쌓인 눈을 치우는 일, 어느 것 하나 고통스럽지 않은 게 없었으니 봉수꾼 일은 고역(苦役) 중 고역이었다.

오랜 세월 쉬지 않고 고역을 치르다 보면 게을러지기도 하는 법이다. 게다가 전쟁이 어디 그리 잦은가? 1년이고 2년이고 아무 소식 없는 저쪽 봉수대를 하염없이 쳐다보기만 하는 것도 못할 노릇이다. 별일 없겠지 하는 마음에, 저쪽 산봉우리에 불빛이 보이면 그때 오르면 되지 하는 생각에 봉수대를 비워두는 일이 허다했다. 재수 없으면 엄형(嚴刑)에 처해지고 심하면 죽기까지 했지만, 재수 없는 날보다는 운수 좋은 날이 훨씬 많았다.

그러다 보니 막상 봉화를 올려야 할 때에는 무너진 봉수대를 다시 쌓고, 나무를 새로 베어 온 다음에 불을 붙이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변방에서 처음 타오른 봉화가 서울에 도달하는 데에는 보통 5∼6일이 걸렸다. 봉수제 운영 실태를 점검할 때마다 여러 사람이 죽거나 다쳤으나 봉수의 전달 속도는 거의 개선되지 않았다.

임진왜란 직전인 1592년 초, 선조는 아예 봉수제를 폐지하고 새로 ‘파발제’를 시행하도록 했다. 파발에는 말을 타고 달리는 기발(騎撥)과 사람이 직접 달리는 보발(步撥)이 있었는데,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기발보다 보발이 더 자주 이용됐다. 파발꾼들은 맡은 구간을 내쳐 달린 뒤 파발 역참에서 다른 파발꾼에게 ‘긴급 문서’를 인계했다. 서울의 구파발은 옛 파발 역참이 있던 곳이다.

이 ‘장거리 계주’ 방식의 새 연락 체계는 상세하고 구체적인 정보를 전달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속도 면에서도 이미 망가진 봉수제에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치명적인 약점도 있었다. 파발꾼이 달리다 넘어져 다치기라도 하면 정보가 바로 증발해 버렸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숙종은 봉수제를 부활시켰다. 이후 봉수와 파발이 함께 운영됐지만, 그 이후 150년간 전쟁은 없었다.

1885년, 서울과 인천 사이에 전신선이 가설되고 전보 연락이 시작됐다. 이로써 ‘구체적 정보’가 ‘빛의 속도’로 전달되는 체계가 만들어졌다. 봉수제와 파발제는 쓸모 없어졌고, 1894년 갑오개혁 때 공식 폐기됐다. 1896년 11월, 일본인 스치다 조료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돼 사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던 김구는 고종의 급전(急電) 덕에 목숨을 건졌다. 전화와 전보가 없었더라면 우리가 기억하는 김구도 없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겨우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 우리는 여러 종류의 통신기기로 부호, 문자, 음성, 영상을 주고받으며 산다. ‘실시간(實時間)’이라는 개념이 ‘시민권’을 얻은 것도 이들 통신기기 덕이다. 시간관념은 정보 전달 속도에 비례하기 마련이다. 봉수제와 파발제가 운영되던 시절에는 ‘반나절’이나 ‘해질녘’이라는 ‘시간대’로도 충분했으나 현대인들은 분, 초의 ‘시각’을 따지며 산다.

온 국민을 전쟁의 참화로 몰아넣을 수도 있는 사건에 관한 보고가 군 수뇌부에게 도달하는 데 한 시간 가까이 걸렸다는 소식을, 사건 발생 20여일이 지나서야 알았다. 광속으로 소통하는 21세기의 한 시간은 파발꾼이 달리던 17세기의 한 달보다 더 긴 시간이다. 천안함 침몰도 놀랍고 두렵지만, 이 시간의 지체가 더 무섭다.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