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인전의 ‘진화’… 광개토대왕서 김연아까지 대한민국 영웅 변천사
입력 2010-04-29 18:10
누굴 존경하는가. 상대를 파악하기에 유용한 질문이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추앙하는 영웅 리스트를 보면 그 사회가 보인다. 영웅이 한 자리에 집결한 곳은? 어린이 위인전집이다. 다음 세대에게 모범으로 추천된 위인 목록에는 오늘 우리 사회의 지향이 담겨 있다. 2010년 어린이들은 어떤 위인을 만나고 있을까. 장군의 쇠퇴, 동시대인의 부상, 묘사는 결점까지. 지난 10여 년간 위인전의 변화는 이렇게 3가지로 요약된다. 5월 5일 어린이날을 앞두고 위인전의 대변신을 살펴봤다.
장군의 시대는 가고
위인전집의 전성기는 1960∼80년대 군사정권 시기와 겹친다. 당시 위인전집을 보면 유독 무장(武將)의 존재가 두드러진다. 왕조 영웅도 많았다.
대표적 위인전집 중 하나였던 계몽사 66년판 소년소녀한국전기전집을 보자. ‘광개토대왕, 진흥왕, 왕건, 세종대왕, 이성계, 최충헌, 최무선, 을지문덕, 계백, 연개소문, 장보고, 강감찬, 이순신….’ 앞의 5명이 왕이고 나머지 8명이 무인(武人)이다. 설파하는 덕목은 충(忠) 효(孝)로 요약된다.
90년대 후반 이래 단행본 어린이책 시장이 급팽창하면서 국가영웅은 대거 퇴장했다. 특히 무인의 퇴조는 두드러졌다.
적장을 죽이고 장렬히 전사한 고구려 장군 유유와 가야 정벌의 공신을 세운 신라 화랑 사다함, 계백과 맞선 신라 화랑 관창, 고려 무신정권의 주역 최충헌 등은 계몽사 금성출판사 정일출판사 등 60∼70년대 인기 위인전집을 풍미한 인물들이다. 하지만 요즘 초등학생에게는 대부분 낯선 이름이다.
국가영웅 중 살아남은 이는 누구일까. 역시 세종대왕과 충무공 이순신이었다. 안중근 장보고 신사임당 광개토대왕 등도 생존에 성공했다.
살아있는 사람이 좋아!
최근 서점가에서 초등학생에게 가장 인기 있는 인물은? 올림픽 피겨 금메달리스트 김연아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다. 부모가 닮길 원하고, 아이들이 따라하고 싶은 역할모델이 이 세 사람이라는 얘기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립자와 미국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같은 해외인물이나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 이희아처럼 감동 스토리의 주인공도 인기가 높다.
공통점은 살아있는 동시대인이라는 점이다. 요즘 부모와 아이들은 몇 백년 전 죽은 국가영웅 대신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 인물에 더 쉽고 빠르게 공감한다.
인물 시리즈로는 각계 전문가와 민주화 주역을 담은 목록이 꾸준하다. 대표적 인물 이야기인 사계절출판사의 ‘우리시대의 인물 이야기’에는 인권 변호사 조영래, 청년 노동자 전태일, 민주주의 등불 장준하, 나비박사 석주명, 마지막 선비 김창숙, 민족시인 신동엽 등이 담겨 있다.
우리교육출판사의 ‘우리인물이야기’도 비슷한 맥락이다. ‘실천하는 지성인 리영희, 길 위의 신부 문정현, 바보의사 장기려, 사진작가 최민식, 광대 공옥진, 새 박사 원병오, 옥수수 박사 김순권, 참 기업가 유일한….’
솔직해야 통한다
묘사 방식도 변화했다. 과거 충무공 전기를 보면 신격화에 가까운 찬양 일색이다.
‘지금으로부터 430여년 전인 이조 제12대 인종 원년의 4월 28일 새벽. 우리 겨레의 은인이요, 우리 민족의 횃불이요, 세계적인 영웅이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태어나신 것이다.’(74년 경지사 이순신편 중)
‘언덕 위에 모여 선 사람들은 꼬마대장의 칭찬을 한다. 저 애는 크면 틀림없는 대장감이야!’(66년 계몽사 이순신편 중)
이런 방식은 요즘 독자에게 외면 받는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건 인물의 인간적 모습, 결점까지 담은 솔직한 묘사다. 훈련 받던 김연아가 코치 몰래 벽장에서 과자 먹는 장면 같은 게 공감 포인트다.
사회적 인식 변화도 극적이다. 다음은 신라 선덕여왕의 일대기 중 한 장면. 아들이 없는 진평왕이 덕만 공주를 후계자로 지목하려 하는 대목이다. 43년의 시차를 둔 여성관의 진화를 읽을 수 있다.
‘(덕만 공주는) 여자의 기쁨이 오로지 착한 지어미가 되어 훌륭한 지아비를 섬기고 어진 어머니로서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우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중략)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진평왕의 말에 공주는 몸이 굳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66년 계몽사판)
‘진평왕이 용춘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말하자 덕만 공주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왜 여자라서 왕이 되면 안 되는 것입니까? 용춘의 능력이 뛰어나다면 제가 신하로 부리면 되지 않습니까?”(2009년 비룡소판)
황인선 파주출판도시 어린이책예술센터 선임연구위원은 이렇게 말했다. “과거에는 어느 위인전집이나 천편일률적으로 비슷한 인물들을 다뤘어요. 지금은 출판사별로 겹치는 것이 거의 없다 싶을 만큼 다양하죠. 무조건 미화하지 않고 결점이나 고뇌까지 다루는 것도 과거와 달라졌어요.”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