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이주은] “여기요, 저기요”

입력 2010-04-29 18:03


“여기요, 주문 받아주세요.”

식당에 가면 서빙을 하는 종업원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 나는 그냥 “여기요” 하고 부른다. 다른 손님들은 뭐라고 하는지 가만 들어보니, 같은 사람을 두고 호칭이 제각각이다. “아가씨, 반찬 좀 더 주세요”하기도 하고, 혹은 “언니야, 여기 물 좀”하기도 한다.

예전에 호명에 관한 알튀세르의 이론을 공부한 기억이 났다. 쉽게 설명하자면, 가령 길을 가는데 뒤에서 누군가 “아줌마”하고 부르고,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이 돌아본다고 하자.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몸을 돌리는 순간, 그 이름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는 그 이름이 품고 있는 사회적 질서 안에 자신을 위치시키게 된다.

그 순간 자신을 ‘선생님’이라든가 ‘사장님’이 아닌 아줌마로 인식했기 때문에 그녀는 뒤를 돌아본 것이다. 이름은 정체성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누군가를 혹은 무엇을 어떤 이름으로 부르는가 하는 것은 매우 민감한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종업원이 서빙해준 밥을 비비면서 이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미술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이어서 미술과 관련된 이름에는 예민한 편이다. 한 예를 들자면 건축물과 관련된 환경조형물 내지는 공공미술품을 지칭하는 것으로 ‘미술장식품’이라는 말이 공식 용어처럼 쓰이고 있다. 아무리 건물 앞에 놓이는 작품이라 할지라도 ‘미술장식품’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은 왠지 석연치가 않다. 건물이 아니라면 작품 그 자체로는 별 가치가 없는 부속 장신구같이 들릴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의 오랜 역사에서 미술 작품은 건물을 장식할 목적으로 제작되어 왔다.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옛 걸작도 알고 보면 아름다움 추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지저분한 구석을 가리기 위해 또는 휑하고 심심한 부분에 뭐라도 채워 넣기 위해 탄생된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경우에는 실용적인 이유로 미술품이 덧대어지는 일도 있었는데, 이를테면 옛 유럽에서는 돌 건물의 벽이 뿜어내는 서늘한 냉기와 음습한 기운을 막기 위해 벽면에 나무 패널을 붙이고 그 위에 그림을 그려 넣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패널화는 미학적 이유도 있었지만 보다 직접적으로는 돌 건물 때문에 다수 제작된 셈이다.

장식물로서의 역할을 했던 미술품의 역사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고유한 영역을 확보하고 자율성을 획득하기 위해 지난 백여 년 동안 미술계에 어떤 노력들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 집요한 노력의 흔적들이 미술사의 굵직한 한 줄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잘 알기에 조금 안타까울 뿐이다. 미술의 자존심을 건드는 이름이라고 할까.

밥값을 내고 식당 문을 나서는데 종업원이 친절하게도 골목까지 뒤따라 나온다. “저기요. 자리에 이것 두고 가셨는데요.” 내가 아까 ‘여기요’하고 부른 그 종업원이다. ‘여기요’하고 불렀으니 ‘저기요’라고 일부러 호칭을 맞춘 걸까.

이주은 (성신여대 교수 미술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