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찍어도 ‘수채화 한폭’ 보성 차밭, 행복한 출사여행

입력 2010-04-28 21:32


곡우를 며칠 지난 터라 연두색으로 곱게 물든 차밭을 상상했다. 하지만 차창을 스치는 보성차밭은 아직도 겨울티를 벗지 못한 묵은 녹색이 대부분이었다. 남도 끝자락 보성에 최근까지 눈이 내리는 등 추운 날씨가 계속되는 바람에 찻잎이 제때 돋아나지 못해서다. 보성차밭을 찾는 상춘객들의 99%는 전남 보성읍 봉산리의 활성산 오선봉 자락에 위치한 대한다원 제1농장을 찾는다. 영화나 드라마의 단골 촬영지로 눈에 익숙할 뿐 아니라 휴대전화 카메라로도 달력그림에 버금가는 사진을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18번 국도를 따라 펼쳐지는 1149㏊의 보성차밭 중 으뜸으로 꼽히는 대한다원은 장영섭 회장이 1957년에 한국전쟁 등으로 폐허화된 차밭을 인수해 조성했다. 그는 민둥산을 유려한 곡선의 차밭으로 일구고 삼나무 편백나무 주목나무 등 300만 그루의 관상수와 방풍림을 심는 등 오랜 세월에 걸쳐 보성차밭의 밑그림을 그렸다.

장 회장이 그린 밑그림에 채색을 한 사람은 계절 드라마로 유명한 윤석호 감독. 그는 드라마 ‘가을동화’와 ‘겨울연가’에 이은 ‘여름향기’의 주요 촬영지로 대한다원을 낙점했다. 송승헌과 손예진이 이색적 풍광의 보성차밭에서 엮어가는 감동의 드라마는 한해 150만 명의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인터넷을 장식한 보성차밭 사진은 촬영 위치에 따라 크게 4종으로 분류된다. 대한다원 진입로인 500m 길이의 삼나무 터널은 첫 번째 촬영 포인트. ‘한국의 가장 아름다운 길’로 선정된 삼나무 터널은 영화 ‘선물’에서 이정재와 이영애가 걷던 길이다. 길이 살짝 휘는 중간쯤에서 아름드리 삼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아침햇살을 담는 게 비결.



대한다원의 차밭은 서 있는 위치와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서로 다른 표정을 짓는다. 등고선을 그리는 차밭 한가운데 위치한 중앙전망대는 두 번째 촬영 포인트.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차밭과 짙은 녹색의 삼나무 숲은 모두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다. 이른 아침 안개가 살짝 드리운 고즈넉한 분위기의 차밭 풍경은 한 폭의 수채화. 차밭과 삼나무 숲이 입체적으로 보이는 차밭전망대와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바다전망대도 좋지만 산을 오르는 수고가 필요하다.

연초록 잎이 싱그러운 봄날에 수녀와 비구니가 자전거를 타고 가는 CF로 유명세를 탄 삼나무 길은 세 번째 촬영 포인트. 차밭을 배경으로 S자를 그리는 삼나무 길을 화면에 넣으려면 길 건너 차밭이 포인트. 이밖에도 대한다원에는 절경이 곳곳에 숨어 있다. 찾는 이가 거의 없는 ‘대나무 숲 가는 길’도 절경 중의 하나로 어른 팔뚝 굵기의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아늑한 분위기의 대한다원이 삼나무 숲에 둘러싸인 ‘닫힌 공간’이라면 보성과 율포를 연결하는 봇재 고개에서 내려다보는 보성차밭은 바다를 향한 ‘열린 공간’이다. 박유전 정응민 등 서편제 소리꾼들이 넘던 고개라고 해서 소리고개로도 불리는 봇재는 부챗살처럼 펼쳐지는 차밭 풍경이 시원하다. 봇재 정상 아래의 다향각과 찻집 ‘초록잎이 펼치는 세상’이 네 번째 촬영 포인트. 등고선을 그리는 드넓은 차밭과 영천저수지, 그리고 잔잔한 바다는 해질녘에 아름답다.

영천저수지 아래에 위치한 도강마을은 서편제 소리꾼으로 유명한 정응민 선생의 생가와 묘소가 위치한 곳. 이곳에서 2.6㎞ 길이의 산길을 걸으면 관광객들이 잘 찾지 않는 득음정과 득음폭포가 녹음 속에 숨어 있다. 득음정은 명창들이 소리공부를 하던 곳으로 지금도 ‘산공부’라는 이름으로 많은 소리꾼들이 찾는 명소.

녹차수도로 불리는 보성이 꼭꼭 숨겨놓은 마지막 비경은 회령다원으로 불리는 대한다원 제2농장. 철쭉으로 유명한 일림산의 남쪽 자락에 위치한 회령다원은 산비탈에 조성된 보성의 여느 차밭과 달리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은 20여만 평으로 제1농장보다 작지만 주변이 확 트여 훨씬 넓게 보인다.

멀리서 보면 보리밭처럼 보여 스쳐지나가기 십상인 회령다원은 대한다원과 달리 입장료도 없고 관광안내시설도 없다. 길을 잃고 헤매다 들르거나 존재 사실을 아는 사진작가 한두 명만 찾을 뿐 고즈넉하고 쓸쓸해 좋다. 회령다원은 해발 고도가 낮고 일조량이 많은 것이 특징. 다른 차밭이 묵은 초록색일 때도 이곳은 막 돋아난 새순들로 연두색 세상을 연출한다.

드라마 ‘여름향기’의 촬영지이기도 한 회령다원은 차밭 중간에 삼나무 대신 편백나무 가로수길이 길게 이어진다. 편백나무 가로수 길을 걸어 산자락에 오르면 드넓은 차밭이 연두색 천을 깔아 놓은 듯 펼쳐진다. 지붕이 낮은 마을 너머로 보이는 바다는 꼬막으로 유명한 득량만.

회령다원은 평지라 차밭 전경을 카메라에 담기가 쉽지 않다. 차밭을 이러 저리 거닐다 녹차가공공장 옥상으로 올라가는 철계단을 발견했다. 옥상에서 보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옥상에 서는 순간 연두색과 초록색 융단을 펼쳐놓은 듯한 광활한 차밭이 발아래 펼쳐졌다. 때마침 나타난 산책객들이 차밭 한가운데서 수채화의 주인공을 자처한다. 색다른 느낌의 보성차밭을 만나는 다섯 번째 포인트다.

보성=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