外風에 약한 외환시장 조금만 불어도 ‘콜록’… 정부 ‘외화 규제’ 다시 만지작
입력 2010-04-27 18:21
지난달 초 대한생명 공모주 청약일(지난달 9∼10일)이 다가오자 서울 외환시장에 불이 붙었다. 하루가 다르게 팔자고 내놓는 달러가 쌓여갔다. 공모에 참여하려는 8억∼9억 달러에 이르는 돈이 원화 환전을 위해 외환시장에 유입됐기 때문이다. 가속도가 붙은 환율 하락세(원화 가치 상승)는 6거래일째 이어졌다. 지난달 2일 1152.6원이던 환율은 같은 달 10일(대한생명 공모주 청약이 끝난 날) 1130.8원으로 22원이나 빠졌다.
최근 금융당국은 삼성생명 공모주 청약(다음달 3∼4일)을 앞두고 초긴장 상태다. 17억 달러가 넘는 자금이 몰려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땅한 대응책이 없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우리 외환시장은 규모가 작은데다 엔터 키 하나만 치면 바로 현금화할 수 있을 만큼 시장이 개방된 탓에 외국인 자금이 너무 쉽게 들고 난다”고 토로했다.
번번이 급격한 외환시장 변동성에 상처를 입었던 정부가 외화 규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국내 자본시장에서 외국자금이 일시에 빠져나가면서 홍역을 치렀던 뼈아픈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포문 여는 정부=외화 규제설이 불거질 때마다 강하게 부인했던 정부가 최근 잇따라 외화 규제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미국 워싱턴에서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 회의를 마친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현지에서 특파원들과 만나 “정부는 은행세 도입 여부를 심도 있게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정부는 재정부, 금융위원회, 한국은행, 금융감독원 등 관계기관을 중심으로 태스크 포스를 구성해 운영하고 있다.
앞서 진동수 금융위원장은 지난 14일 국회 정무위원회에 출석해 “과도한 외화 차입을 억제하기 위해 외화 레버리지를 규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금융회사의 자기자본 대비 외화자산 비중을 규제하겠다는 것이다. 특히 외국은행의 국내 지점에 칼끝이 겨눠져 있다. 외은지점은 국내 외환시장 거래량의 50%를 차지하고 있다.
◇왜 외환시장이 표적인가=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2007년 기준으로 우리 외환시장 거래량은 국내총생산(GDP)과 비교해 5.8%에 그쳤다. 싱가포르(273.9%), 홍콩(161.8%)은 물론 미국(11.8%), 일본(10.6%), 대만(6.0%)보다 낮다.
규모가 작다보니 특정세력의 수급에도 시장이 쉽게 흔들린다. 1억∼2억 달러 정도의 달러 매수·매도 주문에도 환율이 급격하게 움직인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환율이 2008년 초 940원에서 지난해 3월 1570원으로 상승했다가 같은 해 7월 1230원으로 급격하게 움직였을 때 시장 변동성의 40%는 채권시장, 해외펀드 환 헤지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 금융시장을 완전하게 개방해 외화 유·출입이 자유롭다는 점이 외환시장 불안전성을 부추긴다. 외국인 투기자금은 달러를 집중 매수해 환율 폭등을 조장한 뒤 대량으로 달러를 팔아서 환차익을 얻는 수법을 즐겨 쓴다. 환율 폭등으로 채권 가격이 내려가면 환차익을 채권에 투자해 이중으로 수익을 올리기까지 한다.
◇‘은행세’ 급물살 타나=정부는 단기 외화자금 차입을 억제하고, 투기성 외화자금의 유·출입을 제어하는 장치에 주목하고 있다. G20 회의에서도 은행세 도입이 활발하게 논의되면서 투기성 단기 외화자금 규제에 탄력이 붙고 있다.
정부의 계산은 우리와 상황이 비슷한 신흥국과 공조해 G20 정상회의에서 외화 규제 부분을 강조하겠다는 것이다. 국제 공조 없이 우리만 외화 규제에 나서면 외국인의 채권 대량 매각에 따른 채권 가격 급락, 금리 급등 등 금융시장 혼란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이미 신흥국 중심으로 환 투기 세력의 시장 교란을 제재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높다. 브라질은 지난해 10월부터 단기 투자 목적의 외화자금에 2% 금융거래세를 부과하고 있다. 중국도 핫머니 규제를 적극 검토 중이다. 대만은 지난해 말 환투기를 억제하기 위해 외국인 투자자가 대만 달러를 사서 정기예금에 가입하는 것을 금지했다.
금융연구원 김정한 연구위원은 “아시아 금융허브인 싱가포르는 금융위기 당시 외국인 자금 유출을 막기 위해 은행 자산관리 규제를 강화했다”며 “필요하다면 싱가포르처럼 국내 금융시스템 안전성 확보를 위해 과감한 조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찬희 기자 c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