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100년] “냉정한 자료분석 후 日 정부·기업 책임 묻는게 순서죠”

입력 2010-04-27 23:11


경술국치 100년 기획 잊혀진 만행… 일본 戰犯기업을 추적한다

제2부 낯선 기업, 숨은 가해자

⑤ 공포의 노예 노동, 북해도탄광기선


일본 기업의 조선인 강제동원 실태에 관한 실증 자료 수집에 온 평생을 바친 노학자가 있다. 시라토 히토야스(白戶仁康·74)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비바이(美唄)시 교육위원장이다. 그는 1990년대 홋카이도 지방 정부가 구성한 위원회를 맡아 ‘홋카이도와 조선인 노동자-조선인 강제연행 실태조사 보고서’라는 진상규명 분야의 기념비적 연구를 해냈다. 지금도 한국의 강제동원조사위원회가 그에게 각종 사료에 대한 자문을 할 정도다. 지난 1월 31일 취재팀을 비바이 자택으로 초청한 시라토 위원장은 자신을 ‘향토사학자’로 불러달라며 겸손해했다.

-강제연행에 관심을 가진 계기는 무엇입니까?

“대학에서 일본 문학을 공부했지만 졸업은 하지 않고 일일 노무자 사이에서 생활하며 글을 썼습니다. 사회 노동 운동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1972년 대표 탄광 지역인 비바이시에 와서 7년간 일본어를 가르치다 그만두고, 탄광 지역 향토사료관을 설계해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1992년 노태우 대통령이 일본 정부에 강제연행 관련 명부 조사를 했으면 좋겠다고 요청하자 홋카이도에서도 (도의회) 의원들이 진상을 제대로 조사해 보자고 했습니다. 그때 4년간 매달려 내놓은 보고서가 ‘홋카이도와 조선인 노동자’입니다.”

짙은 눈썹에 백발의 시라토 위원장은 칼날 같은 인상이었다. 그는 증언이 아닌 문서를 믿는다고 했다. 그의 단층집엔 서재며 거실이며 안방이며 모두 강제동원 및 일본 탄광 자료로 가득 차 있다. 문서 총량을 말해 달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구하기 어려운 사진 자료의 경우 “약 3000점 보유하고 있다”고 했다.

-왜 그토록 자료를 모은 것입니까?

“70년대 초반까지 대부분 강제연행 연구는 피해자 증언이나 구술 위주였습니다. 그런데 기업이나 정부도 자신들에게 유리한 입장이 담긴 것만 내놓습니다. 그 사이를 메워 줄 것은 자료입니다. 할아버지 한 분이 지도를 그려가면서 이곳에서 50∼60명이 사망했다고 증언하면 당장 그 유골을 모아 놓은 사찰에 가서 확인해야 합니다. 그게 연구자 자세입니다. 구술이 아니라 문서나 증거로 보다 정확한 사실을 찾는 게 중요했습니다.”

-북해도탄광기선(북탄)은 조선인 노동력에 얼마만큼 의존했습니까?

“북탄은 19세기 홋카이도에서 가장 먼저 탄광을 열었는데, 1916년 조선인 35명에게 일을 시켜 보니 무척 잘하는 겁니다. 세계 대공황기에 조선인 노무동원을 확대하면서 북탄 노무계장이 조선인 훈련 매뉴얼을 만들 정도였습니다. 그걸 미쓰비시 비바이 탄광이 가져다 배우기도 했습니다. 북탄이 작성한 ‘부산왕복’이란 비밀문서를 보면, 부산에 출장소 만들어 동원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집에서 자는 조선 사람을 끌고 온 일 등이 낱낱이 적혀 있습니다.”

취재를 마치자 그는 아직도 수동기어를 쓰는 4륜 구동 지프에 취재팀을 태우고 기차역까지 배웅했다. 낡고 허름한 외관과 달리 엔진 소리가 매끄러웠다. 차량 상태가 훌륭하다고 말하자 시라토 위원장은 “23년간 23만㎞를 달린 차”라고 답했다. 그에게 지프는 홋카이도뿐만 아니라 일본 본토에 이르기까지 전국 기업과 공공기관의 자료를 함께 찾아다닌 동반자였다.

그는 “냉정한 눈으로 자료를 분석하는 게 첫째”라며 “그런 뒤 정부 책임을 추궁하고, 그 후에 기업 책임을 묻는 게 순서”라고 당부했다.

비바이(홋카이도) 특별기획팀=글·사진 김호경 권기석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