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100년] 3m 흰눈은 옛 탄광마을 덮고 조선인 恨의 흔적마저 감춰…

입력 2010-04-27 23:23


경술국치 100년 기획 잊혀진 만행… 일본 戰犯기업을 추적한다

제2부 낯선 기업, 숨은 가해자

⑤ 공포의 노예 노동, 북해도탄광기선


그곳엔 하얀 눈에 뒤덮인 폐허만이 남아 있었다. 무심한 세월은 한때 십 수만 명이 살던 탄광 마을을 역사촌으로 바꾸었다.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은 조선인 강제 징용의 흔적마저 감추어 버렸다.

지난 2월 2일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중부 유바리(夕張)시에 들어섰다. 마을 곳곳에는 ‘벤허’ ‘에덴의 동쪽’ 같은 옛날 영화 포스터가 색이 바랜 채 붙어 있다. 유바리 국제영화제의 소산이다. 대부분의 탄광 마을이 그러하듯, 유바리시도 1970년대부터 대형 스키 리조트를 만들고 영화제를 유치해 부활을 꾀했다.

그렇지만 첩첩산중 같은 곳에 깊숙이 들어오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유바리시는 2006년 6월 360억엔의 빚을 안고 파산했다. 석탄역사촌 입구에서 취재진을 맞이한 유바리 리조트 총지배인 도키오 무라카미씨는 “한때는 (유바리시에) 11만명이 거주했지만 지금은 10분의 1만 남아 있다”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관광지로 변한 석탄역사촌은 10월 말부터 4월 말까지 반 년간 휴업한다. 3m 가까이 쌓여 있는 눈 때문에 찾아오는 사람이 드물어서다. 취재팀이 찾은 이날도 이웃한 스키 리조트에는 휴가를 즐기는 관광객보다 혹한기 훈련을 하는 자위대 스키부대원의 숫자가 더 많아 보였다. 톈류(天龍) 등 일본의 유명한 강 이름을 붙인 갱 입구만이 이곳이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일본 전체에서 두 번째로 큰 광업소였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유바리 탄광은 북해도탄광기선(북탄)의 최초 탄광이자 주력 탄광이었다. 2차 대전 당시 7000명 이상의 조선인 노무자가 강제 노역에 시달렸다. 이 수치는 유바리시보다 11년 먼저 파산한 북탄이 남긴 한 줄의 기록에서 유추한 것이다. 북탄은 유바리 광업소에 관해 스스로 작성한 사사에서 “1946년 1월 9일 조선인 165명이 귀국 길에 올랐고, 이로써 조선인 노동자 7316명의 집단 귀국이 종료됐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지난해 기준으로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강제동원 조사위원회)’에 접수된 징용자 수는 1337명뿐이다.

징용자 규모를 밝히는 문제는 차치하고 개개인이 마땅히 돌려받아야 할 후생연금 탈퇴수당조차 당시 화폐 가치인 단돈 99엔으로 돌려주는 것이 오늘날의 일본이다. 윤병렬(86) 할아버지는 열여덟 살인 1942년 충남 홍성에서 홋카이도 소재 북탄의 가모이 탄광으로 동원됐다. 그가 60여년간 고이 간직한 1945년 3월분 임금명세서 맨 위에는 자신의 광부번호 8742와 창씨명이 적혀 있다.

그달 받아야 할 돈의 합계는 ‘임금수당계’로 표기된 31엔60전. 그런데 준조세에 해당하는 공제금이 37엔 2전이다. 공제금에는 후생연금과 충령탑기부금, 심지어 공습공제기금까지 들어 있다. 맨 아래 붉은색 글씨의 5엔42전은 결국 윤 할아버지가 회사에 갚아야 할 채무로 남았다. 윤 할아버지는 이 자료를 강제동원 조사위에 기증하면서 “당시 저축이나 식사 값 등을 제하고 나면 손에 들어오는 게 별로 없었다”며 “작업복이 해져 새로 받으려면 월급에서 제해야 했다”고 말했다.

월급은 제대로 주지 않으면서 노역은 가혹하게 시켰다. 홋카이도청이 1999년 작성한 ‘조선인 강제연행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1945년 6월 말 유바리 탄광 갱내에는 일본인 2433명, 조선인 6135명이 종사했다. 반면 갱 외부에는 일본인 2830명이 일했고, 조선인은 961명뿐이었다. 폭발사고와 낙석 위험이 상존하는 갱내 채탄 작업에 조선인이 집중 투입된 것이다.

불평등한 인력 배치는 고스란히 사망 관련 기록에 영향을 미쳤다. 역시 홋카이도청 보고서를 보면, 1939년에서 1945년까지 유바리 탄광에서 총 127명이 사망한 것으로 돼 있다. 사망 원인 가운데 ‘사고사’는 고작 4건에 그쳤고, 나머지 123건은 ‘원인 불명’이다. 일본인과 달리 현지에서 진상 규명을 요구할 가족이 없던 조선인이 ‘원인 불명’ 사망자의 대부분을 차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후 3시가 지나자 유바리 스키 리조트의 주간 영업이 끝났다. 스키 타던 사람들마저 사라지자 시내는 완벽한 정적에 휩싸였다. 쇠락한 탄광촌에 우뚝 솟은 ‘유바리 희망의 언덕’이라고 새긴 굴뚝에 오렌지 빛 석양이 걸렸다. 그들에게는 한줄기 희망의 언덕일지 몰라도 수많은 한반도 사람들에겐 진실이 파묻힌 절망의 언덕일 뿐이다.

유바리(홋카이도)=특별기획팀 글·사진 김호경 권기석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