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호전에 정부도 입장변화 징후보이는데 총재만 “아직”… 한은 ‘출구전략 냉가슴’

입력 2010-04-26 22:09


“솔직히 정부가 어느 순간 태도를 바꿔 ‘이젠 출구전략(금리 인상) 해야 할 때가 됐다’고 할까 가장 두렵죠. 그런데 벌써 그런 조짐이 나타나는 것 같아서….”

한국은행의 한 간부는 26일 한은의 답답한 처지를 이렇게 역설적으로 표현했다. 금리 동결을 이어갈 이유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경제 상황이 호전됐는데도 한은은 김중수 신임 총재 취임 이후 금리 인상이 무슨 금기나 되는 것처럼 말을 못하고 있는 처지다. 이런 가운데 기획재정부 등에서도 출구전략을 해야 되는 게 아니냐는 의견이 솔솔 나오고, 한은이 이후에 금리를 올린다면 국민들로부터 ‘그럼 중앙은행의 존재 이유가 뭐냐’는 질책이 쏟아질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한국은행이 곤혹스런 처지로 몰리고 있다. 1998년 한은법 개정 이후 최대 위기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여기엔 외부와 내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외부 요인은 기획재정부 등의 통화정책 간섭이 도를 넘은 가운데 세계 각국의 경제회복세가 예상보다 빨라지면서 출구전략이 본격화되고 있는 점이다. 이런 와중에 금리 동결을 더 이어가려는 김 총재와 기존 한은 집행부 간 경기와 통화정책 방향에 대한 인식 차이가 크게 벌어진 모양새다.

◇각국 출구전략 더 빨라진다=그동안 정부가 금리 동결 근거로 내세웠던 항목은 예상보다 빠른 경기회복세에 따라 모두 폐기되는 형국이다. 1분기 들어 고용, 민간자생력 회복, 국제 금융시장 상황 등이 빠르게 호전된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 21일 올해 세계경제 성장률을 4.2%로 상향조정했다. 지난해 10월의 3.1%보다 1.1% 포인트, 지난 1월보다는 0.3% 포인트 더 높아진 것으로, 주로 아시아 신흥국의 빠른 회복세에 힘입은 것이다.

23일에는 수비르 랄 IMF 한국과장이 지난 2월에 이어 다시 한국은 금리 인상을 포함한 본격적인 출구전략을 단행해도 된다고 말했다. 각국의 출구전략 시행도 본격화되고 있다. 호주는 지난해 10월 이후 네 차례나 금리를 올렸고, 말레이시아와 인도도 기준금리를 이달 들어 0.25% 포인트 올렸다. 브라질과 캐나다 역시 조만간 금리를 올릴 것으로 예상된다. 게다가 23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 회의에서 각국의 독자적인 출구전략을 허용하면서 이러한 움직임은 더욱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

◇두 토막난 한은?=지난 9일 김 총재는 처음 주재한 금통위 회의 뒤 금리 동결 이유를 설명하면서 “민간 자생력이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날 금통위에 제출된 ‘국내외 경제동향’과 얼마 뒤 나온 ‘수정 경제전망’ 등에서 한은 조사국은 소비와 투자 등 내수를 중심으로 민간부문 자생력은 물론 고용도 크게 개선될 것으로 예상했다. 김 총재와 한은 조사국의 경기 판단에 거리가 있는 것이다.

SC제일은행 오석태 이코노미스트는 “금통위에 앞서 조사국이 경제동향을 보고한다는 점에서 김 총재가 한은 집행부의 판단을 받아들이지 않은 셈”이라고 말했다.

14일 김 총재가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서 기준금리 인상 시 고려할 점으로 ‘더블 딥(경기 상승 후 재하강)’ 가능성을 제기한 것에 대해선 “해도 너무 한다”는 반응이 나왔다.

일부 한은 간부들은 여러 지표를 종합할 때 늦어도 2∼3개월 내에 기준금리 인상에 나서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자면 다음달 금융통화위원회의 통화정책방향 발표 등에서 최소한 향후 금리 인상을 암시하는 내용이 담겨야 할 것이란 분석이다.

특히 한은은 G20회의 폐회 뒤 윤증현 재정부장관이 저금리가 장기화될 경우의 폐해를 언급한 것에 주목하고 있다. 출구전략 시행에 대해 정부도 미묘한 입장 변화를 보이는 징후가 아니냐는 것이다. 한은이 가장 두려워하는 ‘악몽’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한은의 다른 간부는 “지금까지는 김 총재의 적응기간으로 봐야 한다”면서도 “앞으로 2∼3개월이 결정적인 시기인데, 매우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배병우 기자 bwb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