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조용래] ‘제3세계 英語’에 더 끌리는 까닭

입력 2010-04-26 18:12


“영어 학습 목표가 서구 영어권 국가에 대한 흉내 내기에 그쳐서는 안 된다”

큰딸은 매일 새벽 6시면 집을 나선다. 토익학원 때문이다. 사회복지사로 직장생활 3년차인데 영어에 필이 꽂혔다나 뭐라나. 어떻든 입시 때보다 더 열심인 모습이 안쓰럽고 한편으론 늠름하다.

수강생 대부분이 제 또래 직장인들이란다. 영어 능력이 사회적 신분을 규정하는 시대라지만 다들 참 부지런도 하다. 중국어와 함께 영어를 공용어로 쓰는 홍콩도 영어로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을 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며칠 전 자본시장 견학차 간 홍콩의 지하철 안에서 묘한 광고를 만났다. 혀를 쑥 내민 한 여성의 얼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여성의 혓바닥엔 유니언잭이 그려져 있고, 그 아래쪽엔 ‘영어, 그것 배우자고 영국까지 갈 건 없잖아요!’라고 쓰인 카피가 보였다.

영어학원 광고일까. 한번 눈에 띈 그 광고는 홍콩 체류 내내 여기저기서 눈에 밟혔다. 영어가 상용화된 홍콩에서조차 영어학원 광고가 넘친다는 게 얼핏 이해되지 않았다. 호텔이나 쇼핑몰 직원을 비롯해 은행원들의 유창한 영어는 이쪽이 주눅 들기에 충분할 정도의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카오룽 반도의 중심지인 침사추이역 부근의 허름한 음식점에서 곧 확인됐다. 중국어를 못 하니 짧은 영어로 주문할 수밖에 없었는데 젊은 종업원은 신통(?)하게도 영어를 전혀 못하는 게 아닌가. 한참 실랑이한 끝에 결국 다른 종업원이 와서야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홍콩에도 영어를 전혀 못하는 중국인이 꽤 있다고 한다. 본토에서 밀려들어오는 중국인은 물론 오랜 홍콩 거주자들도 그런 경우가 흔하다고 했다. 하긴 뒷골목 시장에서 듣는 영어와 고급 레스토랑에서 말하는 영어는 차이가 많이 났다.

음식점에서 만난 그 종업원은 중국에서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것일까. 소통이 전혀 되지 못하고 겉돌 때 배어 나온 그의 곤혹스러운 표정은 무엇을 의미했을까. 영어 실력이 학력 수준을 말해주고, 영어 능력 여부에 따라 더 좋은 일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홍콩에서 그도 참 고민이 많겠다.

분명 영어의 시대다. 제국주의 시대의 지배자의 언어가 아니라 세계 곳곳의 민족들이 서로 소통하는 민중의 영어로 자리 잡았다. 홍콩의 구석구석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것도,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별 불편 없이 지낼 수 있는 것은 영어의 힘을 빼놓고는 논하기 어렵다.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서구인들의 말은 잘 못 알아듣겠는데 동남아시아의 영어는 그렇지 않더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발음도 엉망이고 문법도 엉성하지만 소통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이른바 제3세계 영어다. 제3세계란 냉전 시대의 명칭으로 서구 자본주의 국가와 동구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을 제외한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를 지칭한다.

탈냉전 시대에 제3세계 운운하는 것은 좀 어울리지 않지만 비영어권 국가를 통틀어 지칭하기엔 부족함이 없다. 제3세계 영어는 지배자의 언어가 아니고 문자 그대로 소통을 위한 언어다. 물론 현지어를 서로가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쉽지 않은 일이고 보면 국경 없는 글로벌 시대의 소통을 전제로 한 언어로 영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언젠가 대학 총장을 지낸 한 인사는 영어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어륀쥐’라고 발음할 수 있을 정도로 몰입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매우 빼어난 영어를 구사한다고 정평이 났지만 그의 발음은 ‘어륀쥐’보다 ‘오렌지’ 쪽에 더 가깝다.

우리가 ‘어륀쥐’라고 말하는 순간 제3세계 영어권 사람들과의 소통엔 금이 갈 가능성이 크다. 올 가을 열리는 G20 정상회의 의장국인 한국이 가장 유의해야 할 것은 제3세계의 권익 대변이다. 우리의 사회 시스템과 역량을 서구 선진국들처럼 만들자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3세계와 소통을 강화하지 못하면 한국은 아무런 특색 없는 흉내쟁이 국가에 머물 수밖에 없다.

우리의 영어 학습 목표도 서구 영어권 세계에 대한 흉내 내기에 그쳐서는 안 된다. 소통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영어가 아쉽다. 새벽을 가르는 젊은이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다.

조용래 논설위원 choy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