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이상훈] 일본 민주당 정치주도의 본질

입력 2010-04-26 17:48


국가의 권력을 쥐고 통치의 주역이 되는 것은 정치가와 관료제이다. 원래 행정을 담당하는 관료제가 정책결정과정에 있어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지 않는 국가는 생각하기 힘들다. 정치가 특히 정부를 구성하는 정권당의 정치가와 관료 중 어느 쪽이 정책결정에 보다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가가 국가마다 다를 뿐이다. 다만, 제도상의 원칙에 의한다면 정책집행의 장치로서 중립적이어야 하는 관료제는 당연히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 다수파에 의해 구성된 내각의 결정을 충실하게 집행하는 조직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일본의 정책결정과정에 있어서는 관료제가 정치가보다 상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고 하는 점에 대해서는 대개 의견이 일치한다. 자민당 정권 하에서 내각이 실질적으로는 여당의 거물 정치가나 파벌 세력의 역학관계에 의해 조직되고, 정책은 내각이 아닌 자민당과 관료제에 의해 결정돼 왔다. 한국인의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지만, 고이즈미 정권기를 예외로 한다면 내각에 의한 ‘정치가의 주도’가 아닌 상호이익관계에 의해 자민당과 결탁한 ‘관료주도’에 의해 일본의 정책이 결정되어 왔다는 것이다.

‘사업분류’에 국민 박수 받아

이를 타파한다는 명분 하에 민주당이 선거공약을 통해 국민에게 제시한 과제 중 하나가 ‘정치가 주도의 정치’이다. 민주당이 비판한 자민당 정치의 핵심이 ‘관료주도’의 정책결정과정이었고, 이것을 개혁하겠다는 것이 민주당의 공약이었다. 이것이 국민에게 호소력 있게 다가왔고, 국민은 민주당에게 정권을 부여했다.

민주당은 정권획득 후 내각관방에 ‘국가전략실’과 함께 정치주도를 실현하기 위한 조직으로 ‘행정쇄신회의’를 설치했다. 하토야마 총리가 의장으로 있는 이 회의는 ‘사업분류’를 통해 각 성·청이 제시한 사업의 필요성이나 효율성 등을 검증하여 사업을 계속할 것인지 가부를 판단하는 곳이다. 2010년도 예산안을 대상으로 2009년에 실시한 1차 ‘사업분류’에서는 예산삭감 목표액 3조 엔에는 크게 미치지 못했지만, 미디어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국민의 높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평가기준이 불명확하다는 등 여러 비판을 받았지만, 국민이 박수를 보낸 이유는 관료제가 주도하던 자민당 정권과는 달리 예산안 작성 과정이 행정쇄신회의를 통해 전면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정권교체로 예산편성의 과정이 국민의 눈앞에 펼쳐지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한 평가는 사람에 따라 상이하지만, ‘정치 쇼’로서는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하토야마 정권의 급격한 지지율 하락을 막는 수단으로서는 커다란 역할을 수행했다. 1차 사업분류를 실시한 작년 11월의 대부분의 여론조사에서 ‘사업분류’가 80% 이상의 높은 평가를 얻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토야마 총리가 7월의 참의원선거를 앞두고 4월 23일부터 시작한 2차 ‘사업분류’에 기대를 거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25일의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정권획득 후 처음으로 하토야마 총리에 대한 지지율이 20%대로 추락했으며, 정당지지율에서 자민당에게 역전을 허용했다. 이것은 하토야마 총리 및 민주당에게 위기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사업분류’를 하토야마 정권의 마지막 비장의 카드로 보는 시각이 많다.

정치쇼 넘어야 리더십 실현

그러나 원래 민주당이 내세운 정치주도란 행정권의 주체인 내각이 책임을 가지고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다. 내각 안에서도 총리가 국가비전을 제시하고 지도력을 발휘하며, 일체감 있는 내각이 각 성 대신을 통해 관료를 지휘감독하고 행정권을 집행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정치주도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국가비전이 제시되지 못하고, 연립여당인 사민당과 국민신당에 대해서도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위기에 처한 민주당이 ‘정치적 쇼’에 집착하는 한 진정한 ‘정치주도’의 실현은 요원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상훈(한국외대 교수 일본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