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위 권고는 ‘하나마나’… 피진정기관, 무시하거나 일부만 수용
입력 2010-04-25 18:36
국민일보 ‘수용현황’ 분석
국가인권위원회가 내린 권고가 절반 가까이 무시되고 있다. 반면 기관들이 권고 내용 중 일부만 형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꼼수’ 행태는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갈수록 인권위 권위가 추락하면서 심지어는 권고를 무시하는 기관마저 늘었다.
◇묵살되는 인권위 권고=25일 본보가 단독 입수해 분석한 ‘인권위 권고 수용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01년 인권위 설립 이후 결정된 2356건의 권고 중 피진정기관 등이 수용 의사를 밝힌 건수는 1373건(58.3%)에 불과했다. 이는 지난해 11월 인권위가 설립 8주년을 기념해 발표한 수용률(89.1%)과 큰 차이가 난다. 당시 인권위는 ‘일부 수용’ 건수를 수용률에 포함하고, ‘검토 중’ ‘답변 미회신’ 건수는 집계에서 제외했다.
본보가 분석한 자료의 연도별 수용률은 2003년 75.9%에서 2008년 52.3%, 2009년 35.1%로 줄어드는 추세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 진정 사건 권고 수용률은 노무현 정부 초기(2003년 90.4%)에 정점을 찍은 후 2007년 74.6%로 낮아졌고, 2008년 57.7%, 2009년 39.2%로 급락했다.
법원 등 정부기관에 대한 정책과 법률 개선 권고 수용률은 더욱 낮아 총 권고 466건의 수용률이 27.7%(129건)에 그쳤다. 이 역시 김대중 정부 말기(2002년)와 노무현 정부 초기(2003년) 각각 60%, 50%로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한 뒤 20%대에 머물다 지난해 12%까지 낮아졌다.
건국대 한상희 교수는 “인권위가 독립적으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 채 정권에 좌지우지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라고 말했다.
◇꼼수 부리는 기관=이 같은 결과는 피진정기관이 일부 수용을 통해 ‘눈 가리고 아웅’식으로 인권위 권고를 받아들이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실제 인권위 권고 ‘불수용률’은 매년 8∼12%로 큰 변화가 없었다. 반면 2003년까지 11%(30건대) 수준에 머물던 ‘일부 수용률’은 2005년 이후 20%(60건대) 수준으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2006년과 2009년에는 90건대를 기록하기도 했다. 전체 권고 2356건 중 일부 수용 건수도 410건(17.4%)에 달했다.
일부 수용이란 피진정기관이 2개 항목 이상의 권고 내용 중 일부만 받아들인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인권위가 관련자 징계, 교육, 재발 방지 대책 마련을 권고했을 때 피진정기관이 관련자 교육만 시키고 징계나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지 않아도 일부 수용으로 집계된다.
인권위 관계자는 “경찰 등 정부기관이 인사나 제도개선 같은 중요한 조치는 하지 않은 채 겉으로만 인권위 권고를 수용했다고 공표하기 위해 (일부 수용을) 활용하고 있다”며 “이는 사실상 불수용한 것과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인권위 권고에 응답을 하지 않은 경우도 많다. 전체 진정건수 중 3개월 이상 수용 여부를 밝히지 않은 ‘검토 중’ 건수는 321건에 달한다. 이 중 2009년 이전 권고 결정이 났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답변이 없는 경우도 97건이나 된다.
한양대 박찬운 교수는 “현 정부 들어 인권의 가치가 퇴색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며 “인권위가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처럼 법적 구속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관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전웅빈 기자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