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증현 장관, G20 재무장관회의서 높아진 ‘국가 위상’ 실감

입력 2010-04-23 18:29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우리나라가 국가부도 사태를 피하는 길은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 방법뿐이었다. IMF는 수세에 몰린 우리나라에 고압적으로 고금리 정책과 강력한 구조조정을 요구했다. 우리나라의 통화 및 재정정책을 쥐락펴락했던 IMF와 그 배후에 있는 미국은 우리에겐 넘볼 수 없는 철저한 ‘갑’이었다.

그로부터 13년이 흐른 2010년 4월. 대한민국의 위상은 크게 달라졌다. G20(주요 20개국) 의장국인 우리나라의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22일 미국 워싱턴 D.C 재무부 접견실에 들어섰을 때 티머시 가이트너 장관이 직접 마중을 나왔다. 가이트너 장관은 성조기와 나란히 내걸린 대형 태극기 앞으로 윤 장관을 안내했다. 면담에는 미 재무부 차관 2명도 배석했다. 주미대사관 관계자는 “미국 장관이 직접 마중하거나 대형 태극기를 걸어놓는 경우는 아주 이례적”이라고 다소 놀라워했다.

도미니크 스트라우스 칸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와 로버트 졸릭 세계은행(WB) 총재를 만날 때도 우리나라의 국격은 크게 상승해 있었다. 칸 총재 면담 자리에는 존 립스키 수석부총재, 아누스 싱 아시아태평양 국장 등 IMF 고위 인사들이 모두 배석했다. 재정부 관계자는 “외환위기 때는 한 명만 만날 수 있어도 감격할 정도의 인사들인데, 이제 한국 장관의 말을 듣기 위해 모두 모였다”고 말했다. 칸 총재는 각국 재무장관의 면담 요청 때문에 당초 윤 장관과의 면담 시간을 20분으로 잡았으나 이후 일정을 미룬 채 35분 넘게 면담을 진행했다.

윤 장관은 23∼24일 워싱턴에서 열리는 G20 재무장관 회의에 앞서 각국 재무장관의 요청에 따라 1시간 단위로 면담하면서 의제 사전 조율 및 합의안 도출에 바쁜 일정을 보냈다. 각국이 윤 장관에게 ‘눈도장’을 찍으려는 것은 재무장관 회의에서 발언권을 얻고 자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의제를 설정하기 위해서다. 의장국이 동의하지 않으면 의제로 채택될 수 없다.

더욱 주목할 만한 점은 윤 장관이 단순한 의전차원이 아니라 국제경제에 관한 세계 최고 의사결정기구로 부상한 G20 재무장관 회의의 의제를 정하고 코뮤니케(성명)의 초안을 작성해 배포하는 등 실질적인 주도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IMF에 은행세를 포함한 ‘금융권 분담방안’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명령했을 정도다.

한편 윤 장관은 기자들과 만나 “경제회복이 재정 지원에 의존하고 있어 본격적인 출구 전략을 시행하기는 이르다는 게 세계적인 흐름”이라며 한국도 출구전략 시행이 아직 이르다고 밝혔다.

워싱턴=김명호 특파원, 김재중 기자 j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