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이흥우] 私慾에 오염된 기초선거 정당공천

입력 2010-04-22 17:51


“진정한 지방자치는 중앙의 지배와 예속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실현된다”

선거가 한 달 남짓 남았는데 도무지 열기를 느낄 수 없다. 길거리에서 홍보용 명함을 돌리는 예비후보들도 찾아보기 힘들다. 받은 즉시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리는 경우가 다반사나 그 모습마저 볼 수 없으니 선거를 하기는 하는 건지 긴가민가하다.

하긴 관심이 온통 천안함 사고에 쏠려 있는 마당에 선거운동을 해봐야 효과도 의심스러운데다 까딱 잘못하면 욕먹기 십상이다. 게다가 한나라당이 희생자 장례가 끝나는 날까지를 ‘범국민 애도기간’으로 정하고 불가피한 선거운동을 제외한 외부행사를 자제키로 함으로써 6·2 지방선거는 본의 아니게 역대 가장 조용한 선거로 기록될 것 같다.

전쟁 때도 하는 게 선거이니만큼 천안함 사고로 지연됐던 각 당의 공천 작업이 속도를 내고 있다. 그런 와중에 이기수 여주군수의 돈다발 전달 미수사건이 터졌다. 해당 지역구 국회의원에게 현금 2억원을 건네려다 현행범으로 체포된 황당한 사건이다. 공천 발표를 앞두고 얼마나 다급했으면 그랬을까. 특정지역에선 정당 공천을 받으려면 기초의원 1억, 광역의원 3억, 구청장은 5억 이상 줘야 한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도는 판이니 이 군수로선 “왜 나만 잡냐”며 억울한 마음도 들 듯하겠다. 공천에 국회의원 의견이 결정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면 이 군수가 무모한 시도를 하지 않았을 테고, 망신당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곳곳에서 봇물처럼 터져나오고 있는 보복공천 논란 역시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후진정치의 표본이다. 한나라당 부산시당의 경우 지난 총선에서 공천을 받지 못해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돼 복당한 친박계 의원들이 당시 자신을 따라 탈당하지 않았거나 선거를 돕지 않은 친이계 구청장들을 낙천해 보복을 가했다는 시비로 시끄럽다. 개인의 능력이나 자질, 업적보다 의원에 대한 충성도가 공천의 최우선 기준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비단 부산에만, 한나라당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의원들이 기를 쓰고 ‘내 사람’을 심으려는 목적은 2년 후에 있는 총선에 있다. 의원들은 공천권을 무기로 기초단체장과 기초의원들을 총선의 전위부대로 활용한다. 이런 식으로 공천을 받아 당선된 지역일꾼들이 주민과 의원의 이해가 상충할 때 어느 편에 서겠는가. 정치를 그만둘 요량이 아니라면 싫든 좋든 공천권을 쥔 사람에게 줄서기 마련이다. 의원들은 호랑이 새끼를 키우지 않는다. 언제라도 자신의 자리를 넘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천 과정에서 유능한 인재를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미리 싹을 잘라놓으려는 계산이다. 이처럼 정당공천제는 단체장과 지방의원들의 줄서기를 강요해 풀뿌리 민주주의를 왜곡시키고, 그 지역에 필요하고 적합한 인재의 진출을 막는 역할을 하고 있다.

물론 순기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중앙과 지방을 유기적으로 연계해 정치의 효율성을 높이고, 정당의 책임정치를 구현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주변에선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정치학 교과서에나 쓰여 있는 이상에 가깝다. 중앙과 지방이 연계돼 있어 봐야 패거리 정치, 난장판 의회, 폭력과 몸싸움 등 중앙정치의 못된 것만 전염될 뿐이다. ‘의원사천(私薦)제’로 변질된 기초단체장과 기초의원들에 대한 정당공천제 폐해는 당사자가 가장 잘 안다. 이들과 시민사회단체들은 1000만명 서명운동까지 벌이면서 줄기차게 정당공천제 폐지를 요구하고 있다. 그만큼 역기능이 많다는 증거다.

그럼에도 칼자루를 쥔 의원들은 눈 감고, 귀를 막았다. 그럼 그렇지. 정치자금 통로가 되고, 충직한 지역 심부름꾼을 부릴 수 있는 이렇게 좋은 기득권을 의원들이 순순히 내놓을 리가 없다. 이들은 유권자에게 후보자를 판단할 근거를 제시하고, 단체장 등을 견제하기 위해서도 정당공천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솔직하기라도 하면 밉지는 않을 텐데 그런다고 진실이 감춰지진 않는다. 지방자치가 부활한 지 19년이 됐다. 지방이 중앙의 구속과 속박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진정한 자치(自治)가 이뤄진다.

이흥우 논설위원 hw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