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에 불법은 없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원장님, 우리 원장님
입력 2010-04-22 18:07
국내 유일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 윤수진 원장
서울에서 의사가 된 30대 초반 딸이 광주광역시에 사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첫 월급으로 186만원 받았어. 다섯 배 더 준다며 오라는 데도 많은데 어떻게 할까? 계속 다녀?”
딸은 가장이었다.
“너 돈 벌라고 의사 만든 거 아니다. 우리 쓰는 거 줄이면 된다.”
어머니는 딸을 격려했다. 급여가 훨씬 많은 삼성서울병원에서 서울시 산하 공공의료기관인 서울의료원으로 옮긴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그게 2002년이었다.
딸은 올 2월 다시 한 번 병원을 옮겼다. 서울 가리봉동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외노의원). 이주노동자들의 권익 보호 등을 위해 김해성 목사가 설립한 ‘지구촌사랑나눔’에서 운영하는 곳이다.
“오지 않으려고 했죠. 그런데 (김 목사의 부탁을) 계속 거부하자니 마음이 안 좋더라고요. 이게 내 힘으로 하는 게 아니구나, 그러면서 받아들이기로 했죠.”
전문의를 마치면 광주로 내려가 작은 개인병원을 열겠다던 그녀의 계획은 또 한 번 미뤄졌다.
39세 미혼 여의사 윤수진씨. 외노의원 원장이다. 월급 186만원으로 시작해 서울의료원 재직 8년 만에 연봉 1억원을 넘긴 수입은 다시 월 300만원으로 줄었다.
잊을 수 없는 환자들
며칠 전 병원 복도에서 윤씨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윤씨는 반갑게 웃었다.
2년 전 어느 날 밤 혼수상태로 외노의원에 실려 왔던 중국 동포 여성이었다. 당시 서울의료원 신장내과 과장이던 윤씨는 퇴근 후 자원봉사를 하러 왔다가 그 환자를 맞았다. 상태가 너무 심각했는데 웬일인지 환자는 완강하게 치료를 거부했다.
“강제로 끌고 가서 수술했어요. 살리고 났더니 절 원망하는 거예요. 왜 살려놓았냐고.”
알고 보니 살아갈 희망이 없는 사람이었다. 남편과 함께 돈 벌러 한국에 왔는데, 옌볜(延邊)에 떼놓고 온 아들이 죽었고 얼마 후 남편도 사망했다. 그리고 혼자 남은 그마저 병에 걸렸다. 중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한국에서 살아갈 수도 없는 상황.
“수술 후 신장투석을 계속 했어요. 그 한 달간 그 사람도 저도 너무 힘들었는데. 엊그제 건강해진 그분을 다시 보니까 너무 좋았어요.”
의사의 일상에는 보람과 안타까움이 겹쳐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의사는 진땀을 흘린다. 죽음을 피해갈 순 없다. 어떤 죽음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한국에 난민 신청을 했다가 거부당한 에티오피아 사람이 있었다. 그는 에이즈에 식도암 환자였다. 외노의원에서 자원봉사하다 이 환자를 만난 윤씨는 서울의료원에서 수술을 받도록 했다. 치료를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가기 직전, 그의 뇌에서 다시 종양이 발견됐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수술이 아니라서 대학병원 여러 곳에 수술해 달라고 부탁드렸어요. 그런데 그 사람 신분 때문에 접수 자체가 안 되는 거예요.”
외국인 노동자를 살리는 일은 그렇게 종종 법과 제도에 막혔다. 안타까운 시간이 몇 달 흘렀다.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국립의료원에 수술을 부탁하고 돌아온 날, 에티오피아 환자는 숨을 거뒀다. 그리고 이틀 뒤 국립의료원으로부터 “수술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안타까운 죽음은 또 있다. 3년 전, 몸 전체 기관이 급속하게 망가진 다발성장기부전증 환자가 찾아왔다. 필리핀 사람이었다. 윤씨는 화학약품 중독을 의심했다. 필리핀 환자가 일하던 액정 공장에서 또 다른 노동자가 죽었다. 약품 중독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 그 환자는 병원에 와서 일주일 끙끙대다 죽었다.
“만약 그 사람이 한국인이었다면 보호자가 나서고 인권단체도 나서서 진상을 규명하려 했을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산업재해 인정도 못 받고 끝났어요. 가끔 그 사람이 생각나요.”
지금도 생각나는 얼굴들, 슬픔으로 떠나보낸 주검들, 그들이 윤씨를 지금 이 자리로 데려다 놓은 것인지 모른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내국인보다 더 힘들고 가혹한 조건에서 일하고 있는 게 사실이에요. 저는 내국인 외국인 구별하지 말고 최소한의 의료서비스를 외국인 노동자에게도 제공해 주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합법적 신분의 외국인 노동자는 중병으로 인정받으면 공공의료기관에서 무료로 치료받을 수 있다. 그러나 중한 병이 아니라거나 불법 체류 중이라면 치료받을 길이 별로 없다. 외노의원은 돈이 없고, 보험이 없고, 신분이 없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병원이다.
점심식사 7분
월요일인 지난 19일 윤씨의 점심시간은 7분이었다. 외노의원이 2·3층을 쓰는 지구촌사랑나눔 빌딩 1층 무료급식소에서 7분 만에 식사를 마쳤다. 윤씨는 적지 않은 양을 빠르게 먹어치웠다. 그리고 차 한 잔 마실 짬도 없이 진료실로 들어갔다.
“○○○님.”
오후 1시30분. 진료는 정확하게 재개됐다. 좁은 복도 양 옆으로 외국인 20여명이 진료를 기다리고 있다. 대부분 중국동포인데, 흑인도 두세 명 눈에 띄었다.
“예약문화가 없어서 그런지 예약하고 오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무작정 기다리는 사람이 대부분이죠. 그러니까 되도록 빨리 진료를 진행해야 돼요.”
그런데 생각과 달리 진료는 더디게 이뤄진다.
“환자들이 한국말을 제대로 모르니까 시간이 더 걸려요. 똑같은 설명을 대여섯 번 해야 하니까요. 이름이 복잡해서 환자가 뒤바뀌는 경우도 있어요. 커피전문점에서 쓰는 진동호출기라도 하나씩 쥐어주면 좋을 텐데.”
병원에는 평일 200∼250명이 찾아온다. 입원 병동에는 침대 16개가 있다. 원장과 공중보건의 3명, 간호사 1명, 간호조무사 3명이 환자들을 돌본다. 윤씨는 진료실을 옮겨 다니는 순간에도 따라붙어 질문을 퍼붓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산다.
서울 일원동에 사는 윤씨는 아침 5시에 일어나 7시까지 병원에 출근한다. 퇴근 시간은 자정이나 새벽 1시. 그런데 퇴근하는 날보다 병원에서 자는 날이 더 많다고 한다. 당직 근무를 설 의사가 확보되지 않으면 그녀가 나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저한테 남편과 아이가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죠. 결혼하면 이렇게는 못하죠.”
윤씨는 진료실 안 환자용 침대에서 잔다. 침대 옆에는 윤씨의 옷가지 몇 개가 걸려 있다. 밥은 무료 급식소에서 대부분 해결한다. 주방 아주머니들은 윤씨가 오면 계란 프라이를 부쳐낸다. 원장님을 위한 특별 서비스다.
봉사중독자
2004년 개원한 외노의원은 지금까지 20만명이 넘는 외국인 노동자를 무료로 치료해 왔다. 사람들은 외노의원이 7년째 운영되는 것을 두고 ‘가리봉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기적 뒤에는 만성적인 재정 위기가 존재한다. 월 1억원 되는 병원 운영비를 확보하는 일이 쉽지 않다. 지난해에는 특히 어려웠다. 입원실을 모두 폐쇄해야 했고, 원장직도 공석이 됐다. 윤씨가 원장 자리를 받아들인 것도 이 즈음이다.
원장을 맡은 후 윤씨는 하나의 방침을 세웠다. ‘무료라고 해서 질 낮은 서비스를 제공해선 안 된다.’
“찾아오는 분들에게 ‘싼 게 비지떡’이라는 느낌을 주지 않으려고 해요. 무료니까 허접스러워도 어쩔 수 없다, 이렇게는 안 하고 싶어요. 적어도 내국인과 같은 수준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병원은 어려운데 욕심은 많다. 윤씨가 병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자꾸 늘어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입원실에 있는 중국동포 황정희(70) 할머니는 “원장님은 밤도 낮도 없어요. 그리고 그분이 보살핀 환자들은 다 나았어요”라고 말했다.
일주일에 하루 쉬는 일요일, 윤씨는 자택 인근 교회의 예배에 참석한 뒤 교회 사람들과 봉사활동에 나선다. 자폐아동들과 소풍을 가고, 지방으로 외국인 노동자 진료하러 다닌다. 일주일 가운데 자신을 위해 쓰는 시간이 거의 없다. 친구들도 보지 못하고 산다. 윤씨는 “목소리 듣는 걸로 만족하고 있다”고 했다. 이쯤 되면 ‘봉사중독’이다. 윤씨는 “내 힘으로 하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분이 나를 만드신 분이니까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구나, 그렇게 느껴요. 그래서 그분이 하시는 일에 제 몸을 맡기는 거죠. 어려서부터 저를 길러주시고 이 공부를 시키신 분이니까,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 어디라도 가라면 가야 한다, 그런 마음이에요.”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