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홍은혜 (14) “기술 배워 국가에 도움을 주거라”

입력 2010-04-21 17:30


서독 대사 시절, 성탄절이면 인근 나라에서 공부하는 한국 유학생들을 초청했다. 모이면 150명 정도 됐다. 유학생들은 평소에도 자주 대사관을 찾아왔다. 그들은 우리 부부를 부모처럼 생각했다. 유학생들이 가장 먹고 싶어 하는 건 김치였다. 한번은 광복절 기념일에 재독 유학생들을 초청했다. 그들에게 맛난 저녁 식사를 대접하려고 미리 김치를 담가 대사관 뒤뜰 서늘한 곳에 보관해뒀다. 기념일 당일 독일인 도우미를 불러 일찌감치 대청소를 끝냈다. 그리고 저녁에 상을 차리기 위해 김칫독을 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김치가 있어야 할 곳에 쓰레기를 담은 봉투들로 가득 차 있었다. 독일인 도우미가 그곳을 청소하던 중 하도 퀴퀴한 냄새가 나 김칫독을 열어봤고, 당연히 버리는 것인 줄 알고 쓰레기로 채웠다는 것이다.

일단 쓰레기봉투들을 치우고, 맨 위에 있던 김치들을 걷어냈다. 그리고 밑에 깔린 김치 한 조각을 먹어보았다. 맛도 좋고 신선했다. 유학생들에게 대접해도 괜찮겠다 싶어 그 김치를 먹음직스럽게 잘라 내놓았다. 그날 저녁, 나만 알고 있는 비밀 속에서 우리 부부와 유학생들은 너무나 맛있게 식사를 마쳤다. 모두들 행복한 표정이었다.

남편 손원일 제독이 한국에 있을 때는 가족과 함께 지낼 시간이 거의 없었다. 서독 대사 시절에는 틈틈이 가족과 함께했다. 하루는 속도제한이 없는 아우토반을 달린 적이 있다. 그때 손 제독은 끝없이 펼쳐진 고속도로를 부러워하며 말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길이 하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명원아, 네가 우리나라에 이런 거 만들어라.”

명원은 “이런 길을 만들려면 어떤 공부를 해야 하는데요?”라고 물었다. 남편은 “당연히 토목이지. 토목공학과!”라고 대답했다. 사실 명원의 꿈은 해군이었다. 그런 얘기를 했을 때, 남편은 “해군이 되고 싶어하는 학생들은 많으니, 너는 기술을 배워 국가에 도움을 주거라”고 말했다. 결국 명원이는 그 이후 해군에 대해선 함구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아들은 기술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토목공학을 전공했다.

또 남편은 아이들에게 18세 때까지만 지원해주겠다고 얘기했다. 자신이 그렇게 살았듯, 일찍부터 아이들에게 독립심을 심어줘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말이 씨앗이 된 것일까. 4·19 혁명 이후 이승만 정권의 하야와 함께 갑작스레 대사직에서 물러나게 된 손 제독은 미국에서 공부하는 두 아들(명원 동원)에게 용돈을 보낼 수 없게 됐다.

남편은 짧은 편지를 두 아들에게 보냈다. “이제부터는 아비가 돈을 대줄 수 없으니 너희 둘이 열심히 노력해서 살아가기 바란다.” 그때 명원의 나이 19세, 동원은 17세였다.

두 아들은 캘리포니아의 건축공사장에서 막노동 일을 했다. 명원은 벽돌과 목재를 나르다 살이 찢겨 큰 상처를 입었고, 동원 역시 착암기로 바위를 뚫다가 튀어나온 불똥으로 목과 가슴에 화상을 입기도 했다. 아이들은 힘들 때면 외쳤다고 한다. “우리는 독립운동가 손정도 목사님의 자손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린 분들도 계신데, 이 정도의 일은 일도 아니다.”

명원은 현대중공업 현대미포조선 쌍용자동차 등의 중역을 거쳤고, 동원은 뉴질랜드 오클랜드시 건축부에 시니어 프로젝트 매니저로 있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