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용서를 위하여’ 펴낸 소설가 한수산 “필화사건 고문 용서?… 이제는 잊었지요”

입력 2010-04-20 21:37


“저는 이 소설에서 ‘용서에서 화해로, 화해에서 사랑으로, 그 사랑에서 일치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우리들의 삶과 사회의 틀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부초’의 작가 한수산(64·세종대 국문과 교수)씨가 장편 ‘용서를 위하여’(해냄)를 들고 돌아왔다. 2003년 출간한 ‘까마귀’ 이후 7년 만의 귀환이다. ‘용서를 위하여’는 지난해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의 영적 성장기와 신군부로부터 고문당한 상처를 안고 살아온 작가의 개인사를 교차시킨 일종의 고백성사다.

20일 서울 정동의 한 음식점에서 만난 한씨는 “김수환 추기경과 동시대를 산 한 인간이 절망의 황폐 속에서 어떻게 소생하고, 김 추기경이 어떤 영향을 줬는가를 그리려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소설 속에서 실명으로 등장하는 인물, 장소, 내용은 모두 사실 그대로”라고 덧붙였다.

게다가 한씨는 5공화국 때 겪은 개인적인 상처를 상당한 분량으로 털어놓고 있다. 이른바 ‘한수산 필화사건’이다. 당대 최고 인기를 누리던 작가는 1981년 5월 영문도 모른 채 국군 보안사령부로 연행돼 혹독한 매질과 물고문, 전기고문을 당하는 고초를 겪는다. 당시 중앙일보에 연재하던 소설 ‘욕망의 거리’에서 일부 표현이 국가원수를 모독하고 군부정권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한씨는 “당시 사건이 일부 알려지기는 했지만 스스로 자세하게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그 일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고 말했다.

그는 “고문 내용은 쓰기 전에 ‘과연 해낼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담담하게 썼다”면서도 “교정을 볼 때는 다시 보기도 싫어 다른 사람에게 열심히 봐 달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가 당한 고문은 소설에서 묘사한 것보다도 더 심했다고 했다.

연행 1주일 후 풀려난 한씨는 그 후유증으로 3년간 절필했고 필화사건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88년 일본으로 떠났다. 이듬해 가톨릭에 귀의한 그는 92년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그때의 상처는 아물지 않은 상태였다. 오히려 필화사건으로 말미암아 작품세계가 변하고 있었다. “(필화사건) 이전과 이후 내 소설은 확연히 달라집니다. 이전에는 개인의 의식세계를 주로 다뤘는데 이후에는 의식하고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주로 사회적 맥락 속에서 개인의 문제를 들여다보는 글을 썼습니다.”

한씨는 “1980년대 추기경이 ‘적대적인 사람이라도 서로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말을 했는데 그 말이 나에게는 또 다른 상처가 됐다”고 털어놓았다. “‘추기경이 어느 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나처럼 고문을 당해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지요. 그런 의문은 이후 살아가는 과정 속에 명제였고 그런 과정 때문에 이 소설이 쓰인 거죠.”

그는 지난해 2월 김 추기경 선종을 계기로 결심을 한다. “추기경이 말씀하신 ‘서로 용서하세요’라는 말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어요. 그가 우리 개인들에게 남긴 자취가 무엇인지를 더듬어보고 싶었습니다.”

“가해자들을 정말 용서했느냐”고 묻자 그는 “그들을 잊었다. 나를 위해서라도 그들을 용서하려 한다. 그것이 종교가 추구하는 구극의 사랑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과거의 상처를 들춰내는 게 쉽지 않았지만 그는 “이제는 전체적으로 그 일을 정리해 줄 때가 된 것 같다는 주변의 이야기를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한씨는 소설 속 1인칭 화자로 자신의 분신이라 할 작가를 내세워 영혼의 치유 과정과 그 계기가 된 김 추기경의 영적인 삶을 그리고 있다. ‘나’는 김 추기경 선종 이후 1년간 김 추기경의 군위 옛집, 도쿄의 조치대학, 대구 주교좌 계산성당 등 추기경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스스로 고통의 근원을 들여다보며 용서를 말하고 화해를 이야기한다.

한씨는 “김 추기경과는 단 한번 인사를 나눴을 뿐 개인적인 만남은 없었다”며 “그게 오히려 주관적인 회상들을 배제함으로써 엄격하고 객관적으로 한 인간의 생애를 바라볼 수 있게 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한씨는 경기도 양평과 서울을 오가며 교수생활과 작품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올 하반기 출간을 목표로 천주교 성인의 일대기를 그린 장편을 쓰고 있으며 연말에는 한 여성을 통해 굴곡 많은 한국 현대사를 그린 작품을 펴낼 계획이다.

라동철 기자 rdch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