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노동일] 검찰의 갈 길, 검찰의 살 길
입력 2010-04-20 18:22
“어려울수록 正道로 가야하고 힘들수록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부적절한 관계’.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에 의해 유명해진 말이다. 여성들과 육체관계가 아니라 단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을 뿐이라는 그의 답변에 과연 법조인다운 현란한 말재주라는 감탄도 나왔다.
하지만 기실 부적절이란 말은 로스쿨 교육과정에서 흔히 들을 수 있다. 미국변호사협회 모범윤리장전엔 이런 규정이 있다. 부적절한 행위는 물론,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해도 일반인이 보기에 ‘부적절해 보일 수 있는 직업적 행위마저도’ 회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클린턴과 변호사협회가 사용한 단어 자체는 다르지만 뜻은 대동소이하다. 영어로 해서 그렇지 이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경구와도 통하는 바가 있다. ‘오얏나무 밑에서 갓끈 고쳐 매지 말고, 오이 밭에서 신발 끈 고쳐 매지 마라’.
외관상 부적절해 보일 수 있는 행위도 피해야 한다는 법조인 행동지침의 목적은 다른 데 있지 않다. 법률가 전체 혹은 법조직역 자체에 대한 일반 국민의 신뢰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한명숙 전 총리 수사 문제로 인한 논란의 와중에 이른바 스폰서 의혹까지 불거지면서 검찰은 그야말로 사면초가다. 두 사안은 물론 성격이 전혀 다르다. 한 전 총리 수사는 정치적 논란과는 별개로 정당한 직무집행의 일환이라는 명분이 있는 일이다.
5만 달러 뇌물 혐의에 대한 재판도 이제 1심이 끝났을 뿐이고, 정치자금 9억원 수수 혐의도 단서가 있는 이상 수사하는 게 원칙이라면 원칙이다. 그에 비해 ‘스폰서’ 운운은 차원이 다르다. 아직 의혹 제기 단계에서 어떤 것도 단정하기 어렵지만, 만의 하나라도 사실로 확인될 경우 검찰의 신뢰는 가공할 치명타를 입을 수밖에 없다.
이 상황에서 생각나는 단어가 바로 ‘부적절’이다. 검찰이 모든 직업적 행위에서 부적절함은 물론 부적절해 보일 수 있는 경우마저 회피해야 한다는 윤리를 지키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검찰이 한명숙 죽이기를 위해 표적수사를 했다고 믿고 싶지는 않다. 범죄 혐의에 대해 가장 잘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수사의 최일선에 있는 검사일 것이다. 문제는 수사 시기에서, 수사 방법에서, 재판 과정에서, 또 1심 재판 이후 검찰의 행동에서 일반인이 보기에 ‘부적절해 보이는’ 모습이 엿보인다는 점이다.
스폰서 논란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실제로 어울렸다면 ‘검사는 직무수행의 공정성을 의심받을 우려가 있는 자와 교류하지 아니하며’라는 검사윤리강령을 정면으로 위배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 해도 검사가 부적절해 보일 수 있는 관계를 형성했다면 ‘처신에 유의’하지 않은 허물이 있는 것이다.
앞으로 검찰 개혁 방안들이 백가쟁명 식으로 터져 나올 것이다. 스스로 위기라고 느낀다면 검찰 내부에서도 자체 개혁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그러나 지엽적인 업무처리 방식 등에서 크고 작은 개혁안을 내놓는다면 방향을 잘못 잡는 것이다. 검찰의 개혁 방향은 검찰의 근본적인 사명을 자각하는 것이어야 한다.
검찰은 본래 수사기관도, 정치적 집단도 아니다. 검찰은 수사에 대한 법률적 통제기관으로서 수사 대상인 국민의 인권 보장을 위해 탄생했다. 경찰과 경쟁하듯 수사를 벌이고, 이런 저런 사건에서 수사의 일선에 나서는 것은 검찰의 본래 사명과 거리가 멀다. 경찰이 수사한 사건을 검찰이 다시 수사하는 경우도 국민의 인권 보장에서는 오히려 후퇴하는 것이다.
우리 검찰은 기소독점주의, 기소편의주의를 배경으로 세계에 유례없는 막강한 권력집단을 형성하고 있다. 정치적인 사건 수사를 ‘정치적으로’ 잘 처리, 출세가도를 달린 (혹은 현재도 달리고 있는) 검찰 선배들이 많이 있다. 어쩌면 이런 점이 검찰의 제자리 찾기를 더디게 하는지 모른다.
어려울수록 정도로, 힘들수록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재판의 한 당사자이지만 우리 검찰이 스스로를 ‘준사법기관’이라고 자리매김하고 국민들이 그렇게 인정해 주고 있는 이유를 다시 돌아보아야 한다. 검찰이 신뢰받는 길이 무엇인지는 검사윤리강령 제1조가 가장 잘 대변하고 있다. ‘검사는 공익의 대표자로서 국법질서를 확립하고, 국민의 인권을 보호하며 정의를 실현함을 그 사명으로 한다’.
노동일 경희대 교수 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