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100년] “내가 죽을 때까지 日 과거행적 기록으로 남길 것”

입력 2010-04-20 22:27


경술국치 100년 기획 잊혀진 만행… 일본 戰犯기업을 추적한다

제2부 낯선 기업, 숨은 가해자

④ 아소, 골수우익 가문의 탄광 잔혹사


日 강제동원 분야 저명 논픽션 작가 하야시 에이다이씨

왜 식민 지배를 당한 한국에는 정작 이런 르포 작가, 또는 전문 저널리스트가 없을까. 생각해 보면 부끄러운 일이다.

하야시 에이다이(77). 일제 강제동원 분야를 무서울 정도로 집요하게 파고들어 다수의 문제작을 낸 일급 논픽션 작가. 그는 와세다대 문학부를 다니다가 직접 탄광 경험을 하기 위해 중퇴한 뒤 일반 광부들은 물론 노무감독관, 경찰 등을 폭넓게 만나 인터뷰하고 귀중한 사진자료를 수집했다. 그렇게 해서 전문 르포 작가의 길로 접어들어 사료적 가치가 높은 50여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강제동원 분야를 연구하는 한국 전문가치고 그의 저서를 참고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1월 21일, 한때 일본 최대 탄광마을이었던 후쿠오카(福岡)현 다가와(田川)시에 위치한 집필실에서 그를 만났다. 폐질환을 심하게 앓고 있는 백발의 노인이지만 안광은 아직도 형형하고, 거구에서 우러나오는 묵직한 목소리에는 진실을 전하려는 열정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아소 탄광에 대해 취재한 사건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지요.

“1943년 아소광업 산하 (후쿠오카현) 아카사카 탄광에 끌려온 스무 살 전후의 조선인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불결한 환경과 혹심한 더위에도 제대로 씻지 못해 생식기에 피부병이 생겼어요. 습진으로 잔뜩 붓고 아파서 일을 못 나갔는데, 일본인 노무감독 요시무라가 술에 취해 찾아왔죠. 노무감독은 “너 일 안하고 뭐 하느냐”고 따지다 자기가 낫게 해준다면서 청년의 생식기를 칼로 잘라 버렸습니다. 청년은 정신을 잃었고 출혈이 심해 죽고 말았어요. 노무감독은 탄광을 오가는 열차의 선로 위에 시신을 옮겨 놨습니다. 열차에 치어 죽은 것처럼 위장하려 한 것이죠. 그러나 마침 그때는 규슈 지역 일대에 미군 B29기 공습이 있어 열차가 안 다녔습니다. 그래서 시체가 그대로 사람들한테 발견됐어요. 분노한 조선인들은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힘없는 노무자들이니 곧 진압이 됐겠군요.

“아카사카 탄광뿐만 아니라 인근 요시쿠마, 산나이 등 다른 아소 탄광의 조선인들에게도 알려져 약 500명이 농기구 등을 들고 나와 탄광 사무소를 부수는 등 데모를 벌였습니다. 경찰이 100여명 출동했는데, 노무자들이 워낙 많고 기세가 무섭다 보니까 멀리서 ‘그만두라’고 소리만 지르며 사흘간 대치했습니다. 가까이 갔다가는 맞아 죽을 수도 있고, 또 갱내에서 쓰는 다이너마이트를 폭발시킬 수도 있었으니까요. 결국 아소 측에서 사과하고 가해자를 처벌하겠다고 해서 사태가 마무리됐습니다.”

-아소 측에서 노무감독을 처벌했다니 의외군요.

“가해자는 처벌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8·15광복 직후 조선인들이 그 문제로 다시 데모를 일으켰어요. 아소 측은 부랴부랴 조선인들 배편을 주선해 고국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당시 탄광에서 일했던 장손명(1911년생·작고)씨를 비롯해 일본인 료장(寮長·노무자기숙사 사감), 노무계장, 출동 순사 등을 제가 직접 인터뷰해 확인한 사실입니다.”

-조선인 노무자들이 그런 데모를 일으켰다는 것 자체가 놀랍습니다.

“대부분 탄광에서는 그런 데모가 성공하기 힘들지요. 경찰력을 이용해 무자비하게 제압했으니까. 그러나 이 경우는 인간 취급을 하지 않고 사람을 그렇게 간단히 죽여 버리는, 우리도 언제든 간단히 죽일 수 있겠구나 하는 문제여서 모두가 목숨 걸고 필사적으로 일으킨 것입니다.”

-아소 측은 조선인들을 어떻게 동원했나요.

“아소 측은 1938년 4월 국가총동원법이 제정되기 이전부터 조선인을 많이 고용했습니다. 특히 노미야마 다카시라는 인물을 스카우트해 강제동원에 나섰습니다. 노미야마는 조선에서 순사를 했던 인물이어서 조선말과 풍습을 잘 알고 있었어요. 이 자를 아소광업 노무계장으로 기용해 조선에 보냈습니다. 노미야마는 예컨대 전남 화순에 가서 일본 순사한테 ‘나도 순사 출신’이라며 인사한 뒤 화순에 강제동원 대상 노동력이 얼마나 있는지 샅샅이 정보를 알아냈어요. 총독부와 도청 관계자들도 만나 술 먹이고 용돈도 주면서 인간관계를 형성했습니다.”

-치밀하게 작업했군요.

“이렇게 기업 직원이 직접 조선 현장에 가서 용의주도하게 작업하는 방식을 아소 측이 처음 시작한 것입니다. 해당 조선인들한테는 ‘현재 조선에서 받는 임금보다 10배를 주겠다’ ‘하루 8시간만 일하면 된다’ ‘흰밥을 주겠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로 속였고요. 모두 노미야마한테서 직접 들은 얘기입니다.”

-조선인 강제동원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아버지(하야시 도라지)가 예전에 마을 신사를 관리하며 의식을 집전하던 신주(神主)였습니다. 인근 탄광에서 산을 넘어 도망친 조선인들이 신사로 피신해 마루 밑에 들어와 있곤 했는데, 아버지는 이들을 동정해 숨겨주고 음식을 주고 상처도 치료해줬어요. 그리고 밤에 조용히 오사카 쪽으로 도망치도록 기차표를 구해줬습니다.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가는 배표를 끊어주기도 했지요. 나중에 보니까 조선인들이 벗어놓고 간 작업복이 400벌쯤 되더군요. 아버지는 결국 그런 일이 발각돼 1943년 4월 20일 특별고등경찰에 붙들려갔어요. 고문을 당했고, 다음달 4일 47세 나이로 숨을 거뒀습니다. 그렇게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조선인들을 돕는 걸 보면서 저도 자연히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부자(父子)가 대를 이어 조선인 피해자들을 돕는 셈인가. 그는 일본 우익들한테 협박 전화를 자주 받는다. 이런 식이다. “당신 일본인 맞아? 왜 한국인 편드느냐? 너 같은 자는 국적(國賊)이다.” 갖은 위협 때문에 현 자택에서는 혼자 지내고, 부인은 다른 곳에 따로 떨어져 산다고 한다.

그는 이런 말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이 일을 할 것입니다. 일회성으로 하는 게 아니라 죽을 때까지 확실한 기록을 남기려고 합니다. 그게 일본인으로서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내 뒤에는 또 다른 사람이 이 일을 하겠지만, 나는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록하겠습니다.”

다가와(후쿠오카현)=특별기획팀=글·사진 김호경 권기석 우성규 기자 hk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