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문일] 천안함과 다음 대통령

입력 2010-04-19 17:50


“대선 公式이 바뀐다. 국민은 안전과 생명을 지켜줄 단호한 리더십을 원한다”

4·19혁명은 자유당의 2인자 이기붕 국회의장이 고령인 이승만 대통령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부정선거를 획책한 데서 비롯됐다. 그 후 한국 정치에서는 누가 집권당의 차기 대선 후보가 되느냐가 정국을 움직이는 시동열쇠가 됐다. 정권의 2인자가 누군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3선개헌과 10월유신으로 종신집권을 꿈꾸자 공화당 정권 안에서는 후계자가 사라졌다. 대신 대통령을 가까이서 옹위하며 충성을 과시하는 사람의 권력이 커졌다. 차지철과 김재규의 2인자 다툼은 대통령 목숨까지 뺏었다. 전두환에서 노태우, 노태우에서 김영삼으로의 승계는 긴장도 있었지만 정권 재창출이라는 목적의식이 뚜렷해 성공했다. 1차방정식이던 후계 공식이 연립방정식이 된 것은 그 후 산 권력이 죽은 권력을 단죄한 데서 비롯됐다. 김영삼에서 이회창으로의 정권 승계가 이뤄지지 못한 것은 미래 권력이 현재 권력과 너무 일찍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이인제가 그 틈새를 뚫고 나오는 바람에 김대중이 어부지리를 얻었다. 김대중과 노무현은 협력 관계, 노무현과 정동영은 이반(離反) 관계였고 결과는 그에 상응했다.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생래(生來)적인 불일치에 더해 경선 앙금, 세종시 갈등으로 역대 권력승계 모델 중 최악이라고 할 만하다. 어쨌거나 이 모든 불화에도 불구하고 현재 집권당의 차기 대선 후보 자리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은 박근혜다. 둘 간의 권력승계 방식은 노태우-김영삼 관계를 닮을 것으로 예상됐다. 김영삼은 망설이는 노태우를 윽박질러서 쟁취하다시피 3당 합당 때 약속한 후계자 자리를 지켰다.

3·26 천안함 격침으로 그런 예상은 흔들리게 됐다. 국민은 국가안보가 바다 속으로 침몰되는 걸 반복해서 지켜봤다. 북한의 무서운 파괴 의지를 보았다. 과거 좌파 정권이 피운 안개 속에 감춰져 있던 북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주적(主敵)이 돌아온 것이다. 국민의 선택은 진부하더라도 안보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됐다.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명을 지키고 위기를 관리할 수 있는 리더십이 절실해졌다. 천안함 격침을 일찍이 북한 소행으로 판단하고 있는 국민 대다수의 감정은 며칠 전까지 거듭된 청와대의 “신중 대응” 발언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정부 수뇌부가 이 정도 위기도 제대로 관리할 자질과 능력이 결핍되어 있는 것 아닌가?”라는. 늦게나마 어제 이 대통령은 “원인을 끝까지 낱낱이 밝혀내고 결과에 대해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단호하게 대처하겠다”고 선언했다. “철통같은 안보로 나라를 지키겠으며 군대를 더욱 강하게 만들겠다”고 했다.

천안함이 이명박-박근혜 관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도 관심사다. 박근혜는 이 대통령의 강경 대책을 지지할까, 아니면 엇박자를 놓을까. 천안함 사태에 대한 ‘박근혜의 원칙’은 어떤 것일까. 북한의 위협을 세종시 원칙론에 연결시키지나 않을까. 박근혜의 선택은 필연적으로 2012년 국민의 선택에 큰 영향을 미친다. 국민 다수가 납득하기 어려운 엉뚱한 원칙이 나온다면 박근혜의 후보 자격도 낙관할 수 없게 된다. 안보 리더십을 앞세운 제3의 후보가 부상할 수 있다. 천안함은 이 대통령뿐 아니라 박근혜에게도 시련이다.

1982년 4월 2일 아르헨티나가 영국령 포클랜드 제도를 기습 점령하자 영국은 75일간의 격전 끝에 6월 14일 아르헨티나군의 항복을 받고 영토를 되찾았다. 영국은 사상자 452명과 항공기 25대, 함정 13척을, 아르헨티나는 사상자 630명과 항공기 94대, 함정 11척을 잃었다.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는 1만3000㎞나 떨어진 곳에서 전비 15억 달러를 쓰며 벌인 전쟁에 대해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영토와 주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우리는 국가로서의 명예, 세계에서 기본적으로 중요한 원칙, 즉 무엇보다도 국제법이 무력행사에 이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원칙을 지키려 했다.”

대처의 경험이 박근혜의 원칙론에 참고가 되길 바란다. 박근혜가 살 길은 한국의 대처가 되는 길이 아닐까 한다.

문일 논설위원 norwa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