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 CEO 리더십-(19) ‘재계 맏언니’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 “애경과 결혼 40년 男보란듯 일궜죠”
입력 2010-04-19 22:06
“엄마 걱정 마, 학교 앞에서 뽑기 장사하면 되잖아.”
1970년 가을, 집 앞에서 동네 학생들이 오가는 모습을 넋 놓고 앉아 보고 있던 서른네 살의 장영신 회장에게 당시 열 살이던 큰아들(채형석 그룹 총괄부회장)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그해 7월 남편이자 애경 창업주 채몽인 선대사장이 하늘나라로 간 뒤였다. 막내아들을 낳고 병원에 누워있던 장 회장에게 남편의 사망소식을 알려준 신부님은 “너는 지금 하늘이 무너진 것 같겠지만 이 일이 불행으로 끝날지 아닐지는 너 하기에 달렸다. 너에게는 지금 슬퍼할 겨를이 없다. 어린 아이들을 위해 정신을 차려라”라고 힘을 줬다. 돈 액수를 읽으려면 숫자 뒤 동그라미 수를 하나하나 세야만 했던 아줌마가 20개 계열사에 매출액 3조7000억원대 규모의 그룹을 키워낼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가정주부에서 경영인으로=채 선대사장은 1954년 서울 소공동에 애경유지공업주식회사를 창립하고 종업원 50여명과 함께 비누사업을 시작했다. 첫 해에 세탁비누 23만개를 생산했는데 당시만 해도 겨비누나 양잿물로 세탁을 하던 시절이라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이듬해 서울 영등포에 공장을 짓고 56년 국내 최초 화장비누인 ‘미향비누’를 생산했다. 상공부는 미국 원조단을 비롯한 귀빈들의 시찰 코스로 애경유지를 추천했다. 60년에는 윤보선 당시 대통령이 영등포 공장을 직접 방문할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사세가 승승장구일 때 찾아온 창업주의 죽음은 큰 시련이었다. 남편이 공들여 키운 회사가 이제 막 날개를 펼치려는데 그냥 둘 수는 없었다. 올해 일흔넷에 접어든 장 회장은 “한창 사업이 잘 될 때 찾아온 남편의 죽음으로 맑은 날만 계속되지 않는다는 자연의 섭리를 깨달았다. 좋을 때는 교만하게 날뛰지 말고 나쁠 때는 정신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회고했다.
경영에 참여하겠다고 밝혔지만 시작부터 반대에 부딪혔다. 어른들은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며 만류했다. 당시 애경에서 사장을 맡고 있던 큰오빠는 임원 몇몇을 데리고 회사를 떠났다.
72년 7월 1일 첫 출근. 사장 자리에 앉았지만 한동안 직원들은 결재조차 받으러 오지 않았다. 처음 결재서류를 받아든 날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사회에선 임원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위기에 빛난 결단력=경영에 뛰어든 지 얼마 되지 않아 73년 오일쇼크가 터졌다. 정부는 74년 2월 유류가격 82.0%, 전력요금 30.0%, 시내버스요금 20.0% 등 각종 서비스 요금을 올린다고 발표했다. 소비가 급격히 줄고 대내외적 경영환경이 최악으로 치닫는 상황이었다.
이때 장 회장은 ‘시설투자’와 ‘해외시장 개척’으로 요약되는 불황탈출 전략을 세웠다. 원부자재난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 미쓰비시가스케미컬사와 미국 걸프사 등을 방문했다. 76년 11월에는 도쿄, 홍콩, 카이로 등 동남아와 중동지역을 방문해 시장조사를 했다. 그 결과 우유비누, 트리오 등 대표상품의 수출길이 열렸다.
대전에 8260㎡(2500평) 규모의 합성세제 공장을 건설한 것도 이때다. 지금은 ‘불황일수록 시설투자를 하라’는 게 경영 상식이 됐지만 당시로선 매우 이례적인 결정이었다. 75년 공장이 준공될 무렵 합성세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비누 수요를 훨씬 앞질렀다.
78년 7월 영등포 공장 화재 때도 마찬가지였다. 저녁 뉴스를 보다 공장에 불이 난 사실을 알게 된 장 회장은 택시를 타고 부랴부랴 현장에 달려갔지만 이미 창고와 제품이 다 타버린 뒤였다. 공장 마당에는 창고 안 물건을 꺼내느라 온몸이 재 범벅이 된 직원들이 앉아있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해 10월 장 회장은 계획에 없이 임금을 인상했다. 4월 임금을 27% 인상한 뒤 또다시 올린 것이다. 이어 직원들의 용기 있는 행동과 협동정신에 감사를 표했다. 기획실 직원은 “이 어려운 시기에 급료 인상이 적절한지 의문입니다”라고 반문했지만 직원 사기가 높아지면서 매출액은 전년보다 32.1% 증가한 292억9200만원을 기록했다. ‘임직원이 함께 만들어가는 애경’이라는 공감대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자산이 됐다.
◇‘여성’이라는 열등감을 넘어 ‘터프우먼’으로=70년대 초반 울산 석유화학단지에서 삼경화성(현 애경유화)을 비롯한 몇몇 업체의 입주식이 열렸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참석한다고 해서 입주기업 사장들이 모여 리허설을 했다. 입주식 날 박 대통령은 느닷없이 장 회장에게 ‘댁에서는 무엇을 만드느냐’고 물었다. 장 회장은 너무 놀라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관련 협회 사장단 회의에서 누군가 의견을 물을라치면 얼굴부터 빨개졌다. 스스로 만든 자격지심 때문이었다. 이후 장 회장은 어려운 위기에 처했을 때 여자라고 피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다.
80년대 들어 고객의 눈높이가 높아지자 외국 선진기업의 기술을 제품에 접목해 품질을 높이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82년 1월 식료품, 합성세제 분야에서 세계 최대 브랜드를 보유한 영국 유니레버사와 기술제휴를 맺었다.
이후 생산한 비누와 샴푸가 인기를 끌면서 합작사 설립을 검토했다. 당시만 해도 글로벌라이제이션(세계화)이라는 개념이 보편화되지 않은 때라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남편이 세운 회사 팔아먹는 것 아니냐’는 주변 시선도 부담이었다. 합작이 내키지 않던 장 회장은 최후 수단으로 상대측이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내세우기로 했다.
‘기술과 생산 모든 것을 들여오되 기술료는 내지 않는다’ ‘합작은 50대 50으로 하되 애경 중심으로 경영한다’ 등이었다. 며칠 뒤 뜻밖에도 합작을 하겠단 연락이 왔다. 두 회사는 84년 11월 애경산업주식회사 설립등기를 완료했다.
이때부터 장 회장은 애경과 거래하는 외국 업체 사이에서 ‘터프우먼’으로 통하게 됐다. 원리원칙대로 협상하고 최대한 유리한 조건을 뽑아내는 데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없다는 의미였다.
◇‘애인경천(愛人敬天)’ 정신으로 행복한 기업 꿈꾼다=애경은 93년 9월 영등포 공장 부지에 애경백화점 구로점을 세웠다. 채 부회장은 구로점 오픈 행사에서 “이 백화점을 돌아가신 아버지께 바칩니다”라고 말했다. 장 회장은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고 회상했다. 23년 전 ‘뽑기 장사를 하면 된다’고 어머니를 위로하던 아들이 아버지가 다져놓은 터전에서 새로운 미래를 연 것이다.
애경이란 이름은 채 선대회장이 ‘애인경천(愛人敬天)’ 정신에 입각해 국민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좋은 제품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아 지었다. 장 회장은 애와 경의 대상을 고객에게 맞춘다는 의미를 더해 96년 3월 ‘앞서가는 사고, 앞서가는 기술, 앞서가는 경영,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창조하는 기업’이라는 21세기 경영이념을 선포했다. “사랑하고 존경하면 세상은 더 아름다워집니다.” 애경의 슬로건이다.
권지혜 기자 jh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