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케임브리지대 한국인 첫 석좌교수 탄생… 런던대 과학철학과 장하석 교수
입력 2010-04-18 19:38
온도계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맨 처음 온도계를 만든 과학자는 그 온도계가 정확한지 검증해야 했을 텐데. 그러려면 무엇이 ‘정확한 온도’인지 알아야 했을 텐데. ‘정확한 온도계’없이 ‘정확한 온도’를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이렇게 현대 과학의 ‘상식’에 의문을 제기해 온 영국 런던대 과학철학과 장하석(43·사진) 교수가 9월부터 케임브리지대 최초의 한국인 석좌교수로 강단에 선다. 케임브리지대 교수진의 유일한 한국인인 경제학과 장하준(47) 교수가 그의 형이다.
장하석 교수는 18일 본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케임브리지대 과학사·과학철학과 한스 라우징 프로페서(Hans Rausing Professor)로 초빙됐다”고 밝혔다. 한스 라우징 프로페서는 과학사·과학철학과 교수진의 최고위 타이틀로 석좌교수에 해당한다.
그는 “그동안 발표한 논문이 과학사와 과학철학 저널에 절반씩 실렸다. 두 학문을 융합하는 시도와 아이디어를 (케임브리지에서) 높게 본 것 같다”고 말했다. 한양대 철학과 이상욱 교수는 “미국 하버드 스탠퍼드와 함께 과학철학계 3대 대학인 케임브리지에 43세 젊은 동양인이 학과 운영을 좌우하는 석좌교수로 초빙된 건 하나의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케임브리지대 과학철학 후원자의 이름을 딴 한스 라우징 프로페서는 전임자 피터 립튼 교수가 3년 전 사망한 뒤 공석이었다. 이 자리는 반드시 ‘격’에 맞는 학자로 충원토록 규정돼 있다.
3년간 후임자를 물색하던 대학 측은 지난해 11월부터 후보들을 심사해 지난주 임용 결정을 최종 통보했다. 그가 프리젠테이션을 통해 심사위원들에게 제시한 연구 방향은 ‘과학의 다원주의’. 불변의 자연법칙을 찾는 과학에도 ‘다양한’ 진리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온도계 발명 과정을 추적한 2004년 저서 ‘온도계에 담긴 철학(Inventing Temperature)’의 결론이기도 하다. 그는 2007년 이 책으로 ‘지난 6년간 가장 훌륭한 영문 과학서적 집필자’에게 주는 ‘라카토슈 상’을 받았다(이 책은 이상욱 교수가 국내 출판을 위해 번역 중이다).
스탠퍼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1994년 하버드대 박사후과정 때부터 이 책을 구상했다. 10년간 추적한 온도계의 역사는 ‘물은 항상 같은 온도에서 얼고 끓는다’는 가설이 나머지 가설과 겨뤄 승리한 과정이었다.
“온도를 재는 기준으로 버터가 녹는점, 왁스가 굳는점 등 여러 주장 가운데 물이 어는점(섭씨 0도)과 끓는점(100도)이 채택됐어요. 이렇게 탄생해 정밀해진 요즘 온도계로 재보면 물을 담은 용기에 따라서도 끓는점이 달라져요. 온도계를 만든 가설의 허점이 온도계에 의해 들춰진 셈이죠.”
이런 식으로 과학적 상식을 꼼꼼히 되짚고 있는 그는 과학의 진보가 정치의 발전과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완벽한 체제를 찾아낸 뒤 시작하는 정치란 없잖아요. 굴러가며 개선되는 거죠. 과학도 일단 주어진 상황에 맞게 이론을 만들어 시작한 뒤 고쳐가며 진보하는 겁니다. 그러니 ‘승리한’ 이론도 반드시 절대적이지 않고, ‘패배한’ 이론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게 제가 얘기하는 다원주의입니다.”
철학의 시선으로 과학을 보게 된 데에는 형의 영향이 컸다. 미 캘리포니아공대 학부 시절 물리학을 전공하던 그에게 장하준 교수는 “넓은 시야를 가져야 한다”며 책을 건넸다. 인문사회학 서적을 100권 이상 읽은 물리학도는 스탠퍼드 대학원에 진학하며 과학철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경제학과 과학철학의 차이만큼 형제는 달랐다. 책 읽는 속도가 엄청나게 빨랐던 형은 학생회장을 도맡았고, 수줍음 많던 동생은 한 가지에 오래 몰두하곤 했다. 부친인 장재식 전 산업자원부 장관은 두 아들이 사회에 직접 도움 되는 공부를 하도록 유도했다. 역사를 좋아하던 형은 서울대 경제학과에 진학했는데, 과학서적에 빠져 있던 고1 동생은 아버지가 “과학은 미국에나 가야 제대로 공부한다”고 하자 유학 보내 달라며 ‘농성’을 시작해 관철시켰다.
장하석 교수는 9월 탈고를 목표로 ‘물은 H2O인가?’란 책을 쓰고 있다. 과학의 또 다른 상식인 물의 화학식을 둘러싸고 ‘HO’라는 주장과 ‘H2O’란 학설이 50년간 논쟁했던 과정을 5년째 집필 중이다.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