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홍은혜 (11) 상이군인·유가족 도우려 부인회 조직

입력 2010-04-18 17:18


한국전쟁 이후 해군 병원은 환자들로 차고 넘쳤다. 해군 부인들과 함께 전쟁에서 다친 이들을 찾아가 봉사활동을 펼쳤다. 이를 계기로 해군부인회를 만들었고, 나는 회장을 맡았다. 수시로 부인들과 모여 아픈 해군들을 도울 방법을 생각했다. 매주 수요일 목사님을 모시고 병원에서 예배를 드렸다. 이불 베개 옷 등을 세탁해주고, 위로편지도 써줬다. 환자들의 손과 발이 되어 밥도 먹여주고, 대소변도 치웠다.

“이걸로 이를 닦아 입안이 너무 아파요. 죽기 전에 치약으로 이 한번 닦으면 소원이 없겠어요.”

아픈 병사들이 굵은 소금을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해군부인회에서 치약과 칫솔 각각 500개를 구입해 전달했다. 그것을 받아들고 어찌나 기뻐하던지. 해군부인회는 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아픈 병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봤다.

그렇게 돌봄 사역을 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물질로 도울 방법도 찾았다. 구호금을 모으기로 하고, 집집마다 방문해 “전쟁에서 상처 입은 환자들을 도와주세요”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전쟁 뒤라 하루 종일 모금활동을 해도 200원을 넘지 못했다. 무엇인가를 시작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차라리 우리가 스스로 돕고 살자.” 해군 부인들과 함께 작업복을 만들어 팔기로 했다. 직접 삯바느질을 해서 옷을 만들었다. 우리의 이 같은 뜻이 해군본부에 전해져 간이 건물에 공장을 지을 수 있었다. 그곳에 미군의 도움으로 재봉틀 50대를 설치했다. 공장에서 기계가 돌아가자 돈도 모였다.

그 수익금으로 상이군인들의 자활을 도왔다. 진해에 세운 기술지도소를 후원해 상이군인들이 각종 기술을 배워 사회로 진출, 기술자로서 제2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격려했다.

전쟁 미망인들도 보살폈다. 어린 자녀들을 홀로 키워야 하는 그들은 당장 먹고사는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김태선씨를 찾아갔다. “전쟁 미망인들을 도우려고 합니다. 저를 믿고 땅 2만평만 주십시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아마 간절히 기도한 것에 대한 주님의 응답이리라. 6개월 뒤 시장님은 “용두동에 2만평 땅이 있으니 직접 보고 쓰십시오”라고 허락했다.

그때는 제대로 된 건설회사가 없었다. 군인들의 도움으로 미망인 400명이 일할 수 있는 규모의 공장과 탁아소, 유치원, 식당, 목욕탕, 교회를 지었다. 해군부인회에서 작업복을 만들던 경험을 살려 미망인들에게도 그 일을 가르쳤다. 또 미국대사 부인을 통해 미군부대 매점(PX)에 미망인들이 만든 수예품을 팔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해서 전쟁 미망인들이 직접 만든 노란색 빨간색 파란색 목도리 등을 PX를 통해 팔았다. 남편을 잃은 슬픔과 힘겨운 생활고에 시달리던 미망인들의 그늘진 얼굴에 어느새 환한 웃음이 번졌다. 하나님은 그들을 도울 수 있도록 여러 손길들을 붙여주셨다. 환경을 탓하지 않았기에 그 모든 일이 합력해 선을 이룬 것이다.

지금도 그 시절에 갖고 있던 그 열정 그대로다. 드디어 천안함 함미가 사고 발생 20일 만에 인양됐고, 지금껏 그렇게 기도하며 찾던 내 아들들이 돌아왔다. 하지만 아직 귀환하지 못한 수병들도 있다. 어서 빨리 돌아와야 할 텐데….

그 옛날, 해군 병원을 다니며 환자들을 돌봤던 때처럼 당장 유가족들에게 달려가고 싶다. 그런데 그게 마음뿐이어서 더 애가 탈 뿐이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