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이나 증거조작 인정 안된다” 재심청구 잇따라 기각

입력 2010-04-16 18:17

1970년대 긴급조치 위반 사건으로 기소된 피고인들이 낸 재심 청구가 잇따라 기각되고 있다. 법원이 지난해 12월 긴급조치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제청 신청을 각하한 데 이어 재심 청구까지 잇따라 기각해 피해자 상당수가 구제받지 못하게 됐다는 우려가 나온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5부(부장판사 한창훈), 서울고법 형사8부(부장판사 성낙송), 서울고법 형사9부(부장판사 임시규)는 배모씨 등이 낸 긴급조치 9호 위반 사건 재심 청구 4건을 최근 잇따라 기각했다. 재판부는 공통적으로 “이 사건은 ‘위헌으로 결정된 법률 조항에 근거해 유죄 확정 판결을 받은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다”며 “그 외의 경우에 재심을 받으려면 형사소송법이 규정한 재심 사유에 해당돼야 한다”고 밝혔다.



형사소송법 420조는 재심 청구 사유 7가지를 규정하고 있다. 원 판결의 증거 서류나 증거물이 위조 또는 변조된 것이 증명됐을 때, 무고로 유죄 선고를 받은 것이 증명됐을 때, 원 판결의 재판이 확정 판결에 의해 변경됐을 때, 검사나 경찰관으로부터 고문 등 불법 행위로 인한 수사를 받았을 때 등이다. 배씨 등은 고문이나 증거조작을 인정받지 못해 청구가 기각됐다.

결국 고문이나 증거조작을 증명하지 못한 긴급조치 피해자들이 재심을 통해 명예를 회복하려면 긴급조치의 위헌성이 인정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원은 지난해 말 ‘오종상 사건’을 다시 심리하면서 긴급조치에 대한 위헌제청 신청을 각하했다. 오종상씨는 74년 “정부에서 분식을 장려하면서 고관들은 고기를 먹는다”고 말했다는 이유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법원은 당시 “위헌심사 대상이 되는 것은 법률이므로 헌법 규정은 대상이 아니다”고 밝혔다. 위헌제청 신청이 제기된 유신헌법 53조는 대통령이 국가의 안전보장이나 공공질서 위협 등을 이유로 긴급조치를 선포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법원은 긴급조치 개별 조항에 대해서도 “유신헌법이 5공화국 헌법 제정으로 폐지됐으므로 당시 헌법에 근거한 긴급조치는 위헌성 판단 대상이 될 수 없다”고 각하했다.

긴급조치는 국가 존립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입헌 체계를 정지시키는 특별조치로 72년 유신헌법에 근거 조항이 마련된 뒤 79년 9호까지 발동됐다. 완전히 폐기된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이후인 79년 12월이다.

헌법재판소에는 현재 긴급조치 1·2·9호가 헌법에 위배된다는 헌법소원이 제기돼 계류 중이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조영선 변호사는 “위헌심판을 각하하면서 위헌이 아니라는 이유로 재심 청구를 기각하는 것은 긴급조치 피해자의 명예 회복을 막는 것”이라고 말했다.

양진영 기자 hans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