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철환의 성경과 인체(13)
입력 2010-04-16 10:03
영혼과 육체와의 연결
인간의 육체는 영혼을 담는 그릇입니다. 그리고 이 그릇은 본질이 아니라 그릇 안에 담긴 것이 진정한 본질입니다. 저는 오랜 기간을 두고 한의사로서, 한의학자로서, 체질의학자로서 인체를 탐구하고 또 병든 인체를 치료해왔습니다.
결론은 사람은 외적으로는 동물과 다름없는 세포로 구성된 물질적인 몸에 불과하지만 사람은 내적으로는 동물과는 전적으로 다른 영적인 존재입니다. 영적인 존재이므로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상응으로 사람은 하늘을 상징하는 둥근 머리를 위에다 두고 직립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영적인 존재인 사람은 한 순간도 영계와의 연결이 없다면 사람은 일순간에 즉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적 세계가 자연계로 흘러들어가 인간과 동물의 모든 구성 부분을 자극하여 활성화 시킬 뿐만 아니라 산천초목의 모든 식물적인 행위까지도 구성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워낙 외적인 물질적인 것에 익숙해져 있어서 영적인 부분은 간과해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또는 사실상 너무나 흔한 일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거의 생각조차도 안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호흡의 경우에 이렇습니다. 사람은 들숨과 날숨을 갖고 있습니다. 모든 동물과 식물들도 호흡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호흡은 동물의 그것과는 달리 무한히 섬세합니다. 호흡에서 들이마시는 들숨은 자기의 육체와 교통하는 것과 같고 숨을 내쉬지 않고 품고 있는 것은 영과 교통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술가가 극히 정교하고 섬세한 예술 작업을 하거나 의사가 청진기로 가슴 속의 작은 소리를 듣거나, 한의사가 온 정신을 집중해서 환자를 진맥하여 체질을 파악하고 질병을 느끼고자 할 때에는 숨을 멈추어야합니다. 사격하는 선수나 양궁선수가 과녁을 겨눌 때는 무호흡의 시간과 침착한 행동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현대의 인류는 워낙 감각적이라서 영적인 부분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미신적으로 취급하며 인간의 감각으로 확인 할 수 있는 것만 ‘과학적’이라고 이름 짓습니다. 그런데 인체는 감각적 과학의 범주를 넘어서는 현상을 보여줍니다. 한의학에서 가장 대표적인 치료 의학의 부분인 침구학을 예를 들면, 침구학의 기본인 경혈학의 경혈들은 지금의 과학으로 아무리 분석하고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아도 경혈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태고 시대의 사람들은 직관으로 이미 경혈을 알아내어 그것을 12경락과 경혈도에 점으로 표시했고 치료에 응용하였습니다.
물론 지금도 한의사들은 감사하게도 태고 시대 인류가 남긴 유산을 그대로 이용합니다. 이러한 사실 뿐만이 아닙니다. 한의학에서 치료에 응용하는 약물학인 본초학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과학이 아무리 인삼 한 뿌리를 분석해 본들 인삼의 본질을 규명하기 보다는 인삼의 화학적 성분 이상의 것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태고 시대 인류는 인삼을 바라다보고 천사들과의 교통을 통해 인삼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 인삼의 기(氣)를 사람에게 유용하게 쓰고자 노력했습니다.
지금의 현실은 이렇습니다. 환우분이 여기 저기 아프다고 호소하여 양방 병의원을 찾아갑니다. 의사가 온갖 검사를 다 해보았는데도 검사에는 체크되지 않는 것들도 많습니다. 그렇게 되면 양의사는 병이 없다고 진단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세요. 환우분이 아프다면 벌써 그것은 편치 않는 상태, 즉 질병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능적인 이상(부조화)의 상태에서는 감각적 수단으로는 질병을 발견해 낼 수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경우는 불필요한 검사를 이것저것 마구 해대는 비양심적인 의사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경우는 병으로 나약해진 환우분의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힘든 검사를 감행하여 환자분을 더욱더 불안정한 상태로 만들어 버리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쯤에서 발상의 전환을 시도해야겠습니다. 인간 감각의 한계를 인정해야겠습니다. 인간의 외적 감각이 아닌 내적 통찰력을 활용해야만 합니다. 내적으로 생각하고 이성적으로 사려 깊은 판단으로 각자 맡은 바 의료인으로서 또는 환자로서의 책무를 양심적으로 수행해 나가야만 합니다.
<서울 방배동 강남의림한방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