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 함미 20일만에 인양] “월급 많아요, 다 쓰세요” 마지막 인사 남기고… 주검으로 돌아온 아들들

입력 2010-04-16 01:47


그들도 누군가의 아들이자 남편 그리고 아버지였다. 실종자였던 서대호(21) 방일민(24) 이상민(22) 이상준(20) 하사 등 36명은 15일 시신이 돼 가족 품에 안겼다. 어떤 이는 시신조차 발견되지 못한 채 바닷속 어딘가에서 산화되었다. ‘실종자’라는 꼬리표를 떼고 ‘사망자’가 된 순간이었다.

사고 직전까지 “어머니, 아버지 노후는 책임지겠습니다”라며 듬직한 모습을 보였던 아들들, 아내의 재잘거리는 수다를 들었던 남편들. 그들은 풍랑을 헤치고 항해하면서도 꿈을 잃지 않았다. 대부분 어려운 형편에 처해 있었던 이들은 부모님께 드리는 용돈, 아내에게 주는 선물, 그리고 작은 집 한 칸이 소박한 소망이었다. 침몰한 지 20일간 보는 이들의 가슴 한편을 아리게 했던 이들은 이제 모두의 아들이자 가족이 돼 마지막 이별을 고했다.

◇두 달 된 딸이 보고 싶었던 아빠=최정환(32) 중사는 사고 직전 두 달 된 딸이 보고 싶어 지상 근무를 신청했다. 배를 타면서도 늘 방긋 웃는 아기가 눈에 아른거려서다.

천안함에 타고 있던 그는 지난달 24일 아내 최선희씨와 영상 통화를 했다. 아내가 딸에게 휴대전화 화면을 들이대자 아기는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 “아가야, 아빠다. 아빠야!” “앙~” 아내는 얼른 휴대전화를 자신 쪽으로 돌렸다. “애기 보고 싶다. 얼른 집에 가고 싶어. 우리 딸 좀만 더 보여주면 안돼?” “지금 우니까 나중에 보여 줄게.” 그것이 생애 마지막 딸과의 통화였다.

아내는 침몰 사고 후 늘 딸의 얼굴을 더 많이 보여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려 타들어가는 가슴을 쳐야만 했다. 첫 만남 때 ‘아내에게서 후광이 보였다’는 최 중사는 쓰레기 분리수거, 설거지, 요리를 마다하지 않는 애처가였다. 아내는 결혼 1년 만에 바닷속으로 사라진 남편 생각에 실종 후 수차례 정신을 잃었다.

최씨와 같은 회사에 다니는 A씨는 “여자들끼리 모여 남편 흉을 볼 때도 최씨는 항상 ‘정환 오빠는 빼고’라고 말해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며 “함께 사는 장모와 아내에게 곧잘 한식 요리를 만들어 대접했다”고 전했다.

최 중사는 아내의 친구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아내 친구들 앞에서도 때로는 코믹하고 때로는 진지한 모습으로 모임의 분위기 메이커를 자처했고, 아내가 친구들끼리 여행을 갈 때도 손수 가방을 싸줄 만큼 자상했다. 아내는 남편의 월급 외 수당에 대해 관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최 중사는 몰래 모아둔 돈을 슬며시 아내 주머니에 넣어주곤 했다.

지난달 중순 부부는 서울 삼성동에 있는 국제임신출산육아용품 전시회에 참가해 아기 용품을 잔뜩 샀다. 최 중사의 집에는 이때 구입했던 아기 용품들이 지금도 외로이 쌓여 있다.

◇요리사의 꿈도 피지 못한 채=방일민 하사의 꿈은 세계적인 요리사였다. 한식 일식 양식 조리사 자격증을 소지한 방 하사는 요리학과에 진학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편의점,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대신 그는 2007년 3월 하사관으로 임관해 승조원들의 식사를 담당했다. 방 하사는 매일 100여명의 밥을 하는 고된 노동 속에서도 늘 프로 정신을 발휘했다. 방 하사와 함께 근무했던 A씨는 “장교 식탁을 세팅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침을 많이 줬다”며 “일이 많아 힘들어 할 때도 ‘지금 기본기를 익혀 놓으면 앞으로 요리 일을 할 때 도움이 될 것이다’고 말해주곤 했다”고 전했다.

“일민이가 간혹 담임 속을 썩이긴 했지만 그때마다 와서 애교를 부려요. 담임은 그런 것에 살살 풀리잖아요. 그런 애였어요. 정말 열심히 살려는 애였고, 요리로 이름을 날릴만한 애였는데….” 경기도 김포시 양곡종합고등학교 3학년 재학 당시 담임을 맡았던 김태욱 교사는 시신이 발견된 날, 밤이 늦도록 집에 들어가지 못한 채 정처 없이 거리를 걸었다. “마음이 너무 울적합니다….” 제자를 하늘나라에 먼저 보낸 김 교사의 목소리는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너무나 다정했기에 더 마음 아팠던 아들=이상민 병장은 23개월 동안 모은 급여 200여만원을 몸이 불편한 아버지 이병길(60)씨에게 드렸다. 50여년간 중이염을 앓았던 아버지는 청각 장애 5급 판정을 받았고, 누나 이숙희(29)씨는 정신지체 2급이었다. 이 병장의 매형 김종만씨는 “처남이 이런 부분들 때문에 마음고생을 많이 한 탓인지 항상 어른스럽게 행동했다”고 전했다.

조진영(23) 하사도 매월 자신이 사용할 30만원만 지갑 속에 넣어두고 나머지는 모두 아버지에게 부치는, 요즘 애들 같지 않은 청년이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은 문영욱(23) 하사는 2년 전 뇌졸중으로 엄마마저 잃었다. 어려운 형편이었기에 인라인 스케이트 강사 등을 하며 동아대 컴퓨터공학과를 다니던 문 하사는 결국 휴학했다. 이후 해군에 입대한 뒤 매월 100만원 이상 적금하며 미래를 설계했다.

평소 ‘이모’라고 따르던 지인 송모(53)씨는 “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전화했는데 안 받아서 급한 마음에 ‘넌 아닐 거야. 모친이 널 돌봐 줄거다’는 문자를 보냈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사고 나기 며칠 전 송씨의 아들에게 전화해 “이번에는 이상하게 배에 타기 싫다”며 투정을 부렸다고 했다.

평택=박유리 최승욱 김수현 기자 nopim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