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문일] “4·19는 王政 무너뜨린 국민혁명”

입력 2010-04-15 18:50

4·19 혁명의 원인이 된 3·15 부정선거는 자유당 정권의 2인자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서 획책됐다. 85세의 고령인 이승만 대통령의 건강을 생각할 때 누가 대통령직 승계권자가 되느냐가 관심사였다.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조병옥은 선거를 한 달 앞두고 신병을 치료하러 미국에 갔다가 워싱턴의 육군병원에서 사망해 이승만의 4선은 확정적이었다.

이승만은 4월 26일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28일 경무대를 떠나 낙산 기슭 이화장으로 향했다. 경무대 앞에는 며칠 전까지 “물러가라”고 외치던 군중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누군가 “이 대통령 만세! 이승만 박사 만세!”를 선창하자 군중은 일제히 따라 외쳤고 이어 울음소리, 흐느낌 소리가 터졌다고 기자는 전한다(박성환 저 ‘세종로 1번지’).

군중의 태도는 모순 같았지만 당시의 국민 의식을 정직하게 드러낸 일이다. 1948년부터 12년간 건국 대통령으로서 이승만의 권위는 이전 조선왕조의 군왕을 능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1공화국은 사실상 입헌군주정이었다. 식민지를 끼고 왕정에서 공화국으로 넘어온 국민들은 이승만을 국부(國父)라 부르며 왕처럼 생각했고 야당 정치인들도 공경(恭敬)을 잃지 않았다.

오래 풍상(風霜)을 겪은 독립운동가의 카리스마를 앞세운 이승만은 양반에게 휘둘린 조선 왕들보다도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했다. 남북 분단, 좌우 분열, 외국의 군정이라는 삼중의 악조건을 뚫고 독립국가를 탄생시켰다. 전쟁에서 초기의 참패를 극복하는 굴강한 리더십을 보였다. 여러 당파를 번갈아 쓰고 내치며 왕권을 강화한 조선 숙종 만큼이나 정치력도 노련했다.

양녕대군의 16세손인 이승만은 왕족에 대해 모순된 행태를 보였다. 한일병합과 관련해 “임금, 양반, 상투가 없어진 게 세 가지 시원한 것”이라고 말했지만 재미 시절에는 왕족으로 행세했다. 양녕대군이 상속권을 동생에게 넘겨주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고종 위치에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할 정도로 왕족 의식이 강했다(정병준 저 ‘우남 이승만 연구’).

독일 뮌헨대 킨더만 교수가 4·19 기념 학술대회에서 “이승만의 지배 시스템은 “전통적 권위에 대한 충성이라는 유교 개념을 토대로 구축된 것”이며 “4·19는 단순히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린 사건이 아니라, 전통적 유교 개념을 무너뜨렸다”고 주장했다. 전적으로 공감한다. 형식적으로 왕정을 폐기한 대한민국은 4·19를 통해 실질적으로 왕정과 결별했다.

문일 논설위원 norwa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