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엔 ‘괴물’이 산다… 혹시 당신?

입력 2010-04-15 17:42


거리연극 ‘당신의 소파를 옮겨드립니다’

곱사등처럼 불룩 튀어나온 등이 끈끈해 보이는 검은색 오물로 덮여 있다. 긴 머리카락과 얼굴 반쪽, 맨살이 드러난 왼쪽 팔다리는 분명 사람인데 나머지 부위는 형체를 가늠키 어렵다. 치마처럼 두른 흰 천은 여기저기 해지고 찢어지고 더럽다.

지난주 네이버 검색어 순위 1위에 오른 ‘광화문 괴물녀’는 이렇게 생겼다. 서울 광화문 거리를 이런 모습으로 어슬렁거리는 동영상이 인터넷에 등장하자 네티즌들은 괴물녀란 이름을 붙였다.

행인들에 섞여 걷고, 지하도 구석에 노숙자처럼 누웠다가 순찰 중인 경찰관 꽁무니를 쫓아다닌 괴물녀의 정체는 배우 성수연(27·여)씨. 극단 ‘크리에이티브 바키(Creative VaQi)’가 7∼10일 광화문 거리를 무대로 벌인 연극 ‘도시이동 연구 혹은 연극 당신의 소파를 옮겨드립니다’의 한 부분이었다.

이 작품에는 배우 10명이 출연했다. 이나리(25·여)씨부터 김다흰(29)씨까지 모두 20대다. 연출을 맡은 극단 대표 이경성씨는 27세, 조연출 현예솔(22·여)씨는 대학 3학년이다. 영상 담당 이창(여)씨가 30세로 연장자 축에 든다. 대부분 서울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했다.

젊은 연극인들은 “서울에서 이야기를 찾아 무대에 올리고 싶었다”고 한다. 공연을 기획한 임인자(34) 서울변방연극제 예술감독은 “배우와 스태프 20여명 모두 시골집 툇마루보다 도시 빌딩숲이 더 친근한 세대다. 그들에게 서울은 각박한 곳이 아니라 시크(chic·세련된, 멋진)한 이미지의 공간이었다. 그런데 그 안의 삶도 과연 시크한가, 도시란 무엇이고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나란 의문이 생겨 공연을 구상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이 공연에 담을 이야기를 찾아 서울을 상징하는 광화문광장에 간 것은 지난 1월 11일이다. 이후 광화문과 청계천 일대를 매일 돌아다니며 관찰했다. 행인들에게 말을 걸어보고, 즉석 설문조사도 하고, 거리 전체를 보려고 빌딩 옥상에도 몰래 올라갔다.

종로1가 맥도날드 24시간 영업점을 아지트로 삼은 지 두 달쯤 됐을 때, 거리로 흩어졌던 단원들이 맥도날드에 모여 각자 발견한 서울을 얘기하다 ‘괴물’이란 단어가 처음 나왔다. “이 도시엔 괴물이 살고 있는 게 아닐까?”

2007년 창단한 크리에이티브 바키의 작품들은 퍼포먼스에 가깝다. 실험적이다. 지난해 강원도 춘천 마임축제에서 ‘The Dream of Sancho(산초의 꿈)’로 도깨비 어워드를 수상했다. 상금 300만원으로 마련한 서울 성북동 작업실은 13일 단원 10명과 둘러앉으니 꽉 찰 정도로 좁았다.

“‘시크’하던 서울의 인상이 두 달 만에 ‘괴물’로 바뀌었는데, 도대체 광화문에서 뭘 본 거죠?” 질문은 사실 이거 하나였는데 그들은 두 시간 넘게 말을 이어갔다.

배우 신선우(24)씨는 스케이트보드 타는 게 취미라고 했다. 지난 2월 광화문광장에 갈 때도 보드를 챙겼다. 이순신 동상 근처에서 보드에 올라 10m쯤 타고 가는데 관리인 차림의 아저씨가 다가왔다.

“여기선 그런 거 타면 안 돼요!” 쭈뼛거리며 보드에서 내려 몇 걸음 걷다가 아저씨 시야를 벗어났다 싶어 다시 보드에 올랐더니 어디선가 다른 아저씨가 달려왔다. “바퀴 달린 건 타지 마세요!” 신씨가 물었다. “그럼, 여기선 뭘 할 수 있죠?” “걸을 수 있어요.”

신씨는 “광화문광장은 도시 사람들에게 여유와 휴식을 주려고 만든 공간일 텐데 그 휴식도 정해진 규격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갑갑해지더라고요”라고 했다.

이창씨는 비가 세차게 내리던 날 광화문의 밤을 기억한다. 단원들과 늦은 저녁을 먹고 나선 음식점 앞. 넘어져 있는 남자 얼굴에 다른 남자가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 술 취한 이들의 싸움이다.

“빗물이 미처 씻어내지 못할 정도로 피범벅이었어요. 지나가던 사람 몇몇이 걸음을 멈추긴 했는데 그냥 멀찍이 떨어져 우산 쓰고 바라보는 거예요. 마침 저녁 먹으면서 서울의 무관심이 괴물 같다는 얘기가 나왔었는데…. 우리도 달려들어 말릴 생각을 못하고 지나칠 뻔했어요. 자연스럽게 ‘지나가는 사람’이 되더라고요. ‘아차’ 싶어 말리러 가긴 했지만.”

지난 1월 광화문 일대에선 ‘서울 빛 축제’가 열렸다. LED(발광다이오드) 조명이 뒤덮은 거리는 화려했다. 성수연씨는 광화문사거리 대형 빌딩에서 근무하는 친구 2명을 불러내 물었다. “좋겠다. 예쁜 데서 일하니까.”

친구들은 코웃음을 쳤다. “좋긴 뭐가 좋냐. 하루 종일 두 가지 생각밖에 안 하는데. 상사가 어디서 날 보고 있을까, 어떻게 여기서 나갈 수 있을까. 우린 절대 광화문에서 안 놀아. 옆 빌딩에 뭐가 있는지도 잘 모르고.”

김현우(28)씨는 광화문 직장인들을 관찰하며 햄스터(애완용 쥐)를 떠올렸다. “동화면세점 빌딩 옥상에 올라가봤어요. 한참 내려다보고 있으면 이 건물 저 건물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사람들이 꼭 작은 방에 갇혀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햄스터 같아요. 방에서 나가고 싶은데 길을 찾지 못하는.”

광화문 빌딩들을 매미에 비유한 건 김유진(29·여)씨다. “점심시간 퇴근시간이면 사무용 빌딩은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와요. 매미가 벗어놓은 껍데기처럼 텅 비고, 대신 카페나 식당이 일제히 가득 차죠. 스트레스 풀고 쉴 만한 공간이 그런 데밖에 없으니까요.”

그는 광화문 사람들을 상대로 간이 설문조사를 했다. 질문은 “혼자 쉬고 싶을 때 갈 곳이 있나요?”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역무원은 의무실 침대로 간다고 했고, 광화문광장을 순찰하는 의경은 경찰버스에서 대기할 때가 쉬는 것이라고 말했다. 카페 주인과 건물 매점 아줌마는 “없다”고 답했다.

석 달 가까이 관찰한 광화문 일대는 견고하게 짜인 규칙에 따라 움직여야 하고, 화려한 볼거리를 즐거워하는 이가 별로 없고, 서로에게 무관심한 사람들이 혼자 쉴 곳도 없는 공간이었다고 한다. 이런 데선 괴물도 살지 않을까, 혹시 우리가 괴물이 아닐까란 생각에 성수연씨를 괴물로 분장시켰다. 도시의 보이지 않는 흉칙함을 형상화했다.

공연은 7∼10일 오후 5시45분∼7시에 광화문사거리를 중심으로 6개 지점에서 진행됐다. 동화면세점∼일민미술관 횡단보도, 세종문화회관 앞 인도, 광화문광장 밑을 지나는 중앙지하차도, 교보빌딩 앞 인도, SK빌딩과 청계천 사이 버스정류장, 그리고 코리아나호텔 1502호다.

괴물녀 동영상은 지난달 23일 4시간 동안 미리 촬영했다. 쓰레기가 담긴 검은색 비닐봉투를 두툼히 엮어 곱사등을 만들고 검정콩과 물엿으로 오물 효과를 냈다. 코리아나호텔 객실 TV로 이 영상을 본 관객이 광화문 일대를 걸으며 배우들의 퍼포먼스를 통해 서울의 모습을 느끼도록 공연이 구성됐다.

성수연씨는 퇴근 인파 가득한 동화면세점 앞길에 주황색 소파를 놓더니 TV 리모콘을 들고 앉아 일민미술관 외벽의 대형 전광판을 향해 눌러댔다(쉴 곳 없는 도시인의 모습이라고 한다). 김유진 이나리씨는 똑같은 트렌치코트를 입고 공중전화 부스에 나란히 들어가 수화기 너머 누군가와 한참 통화했다(제복 입은 의경 2명이 순찰 도중 이 부스에서 나란히 전화하는 걸 봤는데 그들이 광화문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탈 행위로 보였다고 한다).

파자마 차림의 김다흰씨는 교보빌딩 앞 버스정류장에 돗자리를 깔고 가스레인지 세면도구 컵라면 등을 가지런히 올려놓고는 책을 읽거나 잠을 잤다(그는 매일 같은 시간에 버스정류장을 거쳐 출퇴근하는 직장인들을 보면서 차라리 정류장에서 살면 어떨까란 생각을 했다).

SK빌딩 앞 버스정류장에선 김현우씨가 여자친구를 때릴 듯 몰아세우며 싸우는 장면을, 주현우(29)씨가 청계천 난간 아래로 투신하려는 모습을 연기했다(이들은 실제 상황인 것처럼 진행된 공연에서 행인들이 끼어들어 말리면 어떻게 연기를 이어갈까 고민했지만 그런 사람은 없었다고 말했다).

배경설명 없이 인터넷에 퍼진 괴물녀 동영상은 지난 9일 연극의 일부임이 알려질 때까지 숱한 추측을 낳았다. 어떤 이는 노숙자라 했고 환경 오염을 경고하는 행위예술이란 주장도 나왔지만 서울과 그 사람들의 모습일 거라고 눈치 챈 댓글은 보이지 않는다. 배우들이 서울을 잘못 읽었을 수도,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그 실체를 모르는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이것은 서울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이다.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