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용의 공간 너머] 김소월과 나도향, 그리고 88만원 세대

입력 2010-04-15 17:57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익히 외는 시 ‘진달래꽃’을 지은 김소월은 평북의 명문 오산학교와 서울의 명문 배재고보를 거쳐 일본에 유학, 도쿄 명문 도쿄상대에 입학했다. 재학 중 ‘간토 대학살’을 겪은 그는 학교를 중퇴하고 귀국했다. 김소월은 중학생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해 19세에 등단했으며, 유학시절은 물론 귀국 직후에도 창작열을 불태워 모두 154편의 시를 발표했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부터 시 짓기를 그만두고 고향에서 신문사 지국을 운영했다. 생활고 때문인데 이 사업이 실패하자 술로 세월을 보내다 1934년 33세에 음독자살했다.

‘물레방아’ ‘벙어리 삼룡이’ 등의 소설 작품을 남긴 나도향도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당시 조선 제일의 학교였던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의학이 적성에 맞지 않았던지 중도에 유학을 결심하고 도일(渡日)했으나 학비를 마련할 길이 없어 바로 귀국했다. 그 후 별다른 직업 없이 소설 집필에 전념하던 그는 1926년 25세 나이로 요절했다.

한국 문학사에 길이 빛나는 ‘불후의 명작’을 남긴 두 사람은 1902년생이다. 장편 소설 ‘탁류’를 지은 채만식, ‘사랑 손님과 어머니’의 주요섭, ‘향수’의 정지용도 동갑내기다. 이들 또래에는 특출한 작가가 많았다. ‘감자’ ‘배따라기’의 김동인, ‘빈처’ ‘운수좋은 날’의 현진건, ‘나는 왕이로소이다’의 홍사용, ‘파초’의 김동명, ‘불놀이’의 주요한이 1900년생이며,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이상화, 신경향파 문학의 개척자 박영희, ‘탈출기’의 최서해, ‘금삼의 피’의 박종화는 1901년생이다. 1903년에 태어난 걸출한 작가로는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지은 김영랑, 작가이자 언론인으로 유명한 김기진,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등 숱한 시조 작품을 남긴 이은상이 있다.

과장하자면, 1900년부터 1903년 사이에 태어난 문인들 이야기만으로도 한국 근대 문학사의 반을 채울 수 있을 정도다. 신이 특별한 재능을 특정한 세대에 몰아주는 ‘괴벽’을 지녔기 때문일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 세대가 함께 겪은 ‘시대상’이 이들을 뛰어난 작가로 만들어줬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일 게다.

이들은 대한제국에서 태어나 열 살 즈음에 나라가 망하는 것을 지켜보았고, 식민지 차별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어려서 한문을, 보통학교 입학 후에는 조선어와 일본어를, 고등보통학교 이후로는 영어나 독일어를 배웠다. 여러 언어를 배우면서 문학에 대한 감수성과 욕구가 깊어졌을 수도 있고, 일제의 치밀한 검열망을 우회하는 길을 찾는 과정에서 문학적 수사(修辭)와 메타포를 발전시켰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근본적인 배경은 이들이 ‘근대적 고등실업자군’의 첫 세대였던 데에서 찾아야 할 듯하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을 계기로 전례 없는 호황 속에 고도 성장을 거듭하던 일본은 종전(終戰) 직후 ‘전후 공황’에 빠져 들었다. 설상가상으로 1923년에는 ‘진재(震災) 공황’이 닥쳐 장기간 경기 침체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1920년대판 ‘잃어버린 10년’이었다.

취업난은 조선 청년들에게 훨씬 심했다. 고등교육을 받은 조선 청년들이 부쩍 늘어난 데다 본토 취업난을 피해 조선에 건너온 일본인들까지 취업 경쟁에 합류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3·1운동 직후여서 총독부 하급 관리라도 되려면 ‘민족의 양심’을 팔았다는 자괴감을 떨쳐 버려야 했다. 순수한 열정을 품은 젊은이들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양심과 생계를 함께 보장해 주는 직장이라고는 학교나 신문사 정도밖에 없었으나 이런 곳에 취직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고등교육을 받은 수많은 젊은 인재들이 ‘문필가’라는 칭호 뒤에 ‘룸펜 인텔리’의 실체를 숨기는 일이 유행이 됐다.

이들의 작품을 낭만주의, 허무주의, 사실주의 등 어떤 유파로 분류하든 간에, 그 분위기는 대체로 어둡다. 이들은 암울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논 팔고 소 팔아 학비 대준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자책감, 안정적 직업을 구할 수 없는 데에서 오는 좌절감, 공부도 못하고 재주도 없던 동기생들이 연줄로 좋은 직장에 취직해 거들먹거리는 꼴을 보고 느끼는 허탈감 등이 이들의 의식과 무의식을 지배했다. 1920년대 전반을 아름답게 수놓은 불후의 명작들에는 좌절, 자책, 허무, 분노, 체념이 응축돼 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하지 못하는 청년 실업자들이 해마다 늘고 있다. 직장의 질도 아주 나빠져서 비정규직이 태반이다. ‘저주받은 세대’니 ‘88만원 세대’니 하는 말은 이제 사전에 올려도 좋을 만큼 일반화했다. 삶의 돌파구를 찾으려 고뇌하는 이 세대가 후일 어떤 천재들을 낳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설령 우리 후손들이 기억할 ‘불후의 명작’이 줄어드는 한이 있어도, 이들을 좌절감과 절망감 속에 방치해 두어서는 안 된다. 정부도 기업도, ‘젊은이가 불행한 시대’는 그냥 ‘불행한 시대’로만 기억된다는 사실을 명심했으면 한다.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