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달랐던 스물아홉, 남다른 배우 되다… ‘다운증후군 배우’ 강 민 휘

입력 2010-04-15 17:37


11일 저녁 8시, 서울 성북동 한 가정집에서 독립영화 ‘야간수업’ 촬영이 시작됐다. 서강대 영상대학원에 다니는 이승주(30)씨의 졸업작품이다.

분장을 끝내고 대기하던 강민휘씨가 커다란 마스크로 얼굴 대부분을 가리고 점퍼를 입었다. 영락없는 도둑이다. 이날 촬영은 도둑질하는 장면이다.

“자, 연습 한 번만 합시다. 민휘씨는 계속 쳐다보시고…. 자기 신발을 봐야죠. 그렇죠, 자기 신발을…. 오케이.”

민휘씨가 “오케이”를 따라 외치며 이승주 감독과 손바닥을 마주친다.

29세. 연예기획사 디앤지스타 소속. 연기 경력 5년. 강민휘씨는 배우다. 그냥 배우가 아니다. 감독이 “시나리오 쓸 때부터 민휘씨를 염두에 뒀다”고 말하는 그런 배우다.

민휘씨는 2004년 장애인 배우를 육성하는 현 소속사에 오디션을 봐 합격했다. 2005년 영화 ‘사랑해 말순씨’에서 다운증후군 환자 ‘재명’ 역을 맡아 데뷔했다. 드라마, 연극, 뮤지컬 등 장르를 넘나들며 활동하고 있다. 출연작이 13편. 필모그래피(영화작품 목록)가 제법 화려하다. 드라마 회당 출연료도 50만원에 이른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를 ‘배우’라 부르기를 주저한다. 민휘씨가 다운증후군 환자이기 때문이다. 민휘씨의 연예 활동을 ‘장애인의 이색 도전’ 정도로 보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분명 배우다. 한국 영화계 최초의 지적 장애인 배우.

“이제 실내 촬영합시다.”

감독이 다시 민휘씨를 불렀다.

“할아버지 뒤를 따라 거실로 들어오세요. 문을 살짝 닫고. 이렇게 화면 밖으로 빠져나오시면 됩니다.”

감독 설명이 끝났다.

“액션!”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사방은 조용하다. 문이 빠끔 열리고, 좀도둑 역을 맡은 전영웅(72)씨가 거실로 들어선다. 뒤따르는 손주 역의 민휘씨 표정엔 ‘침입자’의 긴장감이 역력하다.

연기는 상상이다. 겪어보지 않은 일을 머릿속에서 그려낸 뒤 그 그림 속으로 자신을 밀어넣는 작업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의 지능’을 가진 민휘씨가 이를 해내고 있다.

“대사를 본 뒤 상황에 몰입하는 능력이 천재적이에요.”

연기 선생 박제우(39)씨의 칭찬이다.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한다

“컷!”

민휘씨는 열쇠를 뽑은 뒤 문을 닫지 않았다.

“다시 한 번만 민휘씨, 액션!”

이번에는 문을 너무 조금 닫았다.

“문을 더 닫아줘요.”

주문은 계속됐다. 촬영은 더뎌 보였다.

“일반 배우들도 저런 실수는 다 해요. 다를 바 없어요.”

민휘씨 때문인지를 묻자 현장 스태프는 고개를 저었다. 두어 번의 설명이 더 필요할 뿐이란다. 이 정도 수고만 보태면 민휘씨는 일반 배우와 다를 바 없는 연기를 해낸다.

“말로 알려주면 세 가지 중 두 가지는 잊어버려요. 하지만 몸으로 직접 보여주면 금방 이해하고 따라해요.”

옆에서 지켜보던 박 선생이 말을 보탰다. 열세 번의 반복 끝에 해당 신 촬영이 끝났다.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정적 속에서 촬영할 땐 지켜보는 사람에게도 압박감이 느껴진다. 그런 상황에서 감독 지시를 준수하며 연기를 해낸다는 건 일반인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연기가 가능한 건 민휘씨가 가진 배우로서의 재능 덕분이다. 그는 특히 암기력이 뛰어나다. 상대 배우의 대사까지 모두 외워버릴 정도라고 한다.

민휘씨가 배우 생활을 하는 걸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부른다. 그 기적은 민휘씨와 어머니가 함께 만들었다. 민휘씨는 비장애아들과 함께 컸다. 어머니는 아들을 특수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초·중·고교를 특수학급이 있는 일반학교에 보냈다. 대학도 다녔다. 어려서부터 밥짓기 청소하기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가르쳤고 고교, 대학교 재학 때는 부모와 떨어져 살게도 했다. 이런 훈련이 차곡차곡 쌓여 기적이 됐다.

“다운증후군 아이들은 음식 조절을 못해요. 그래서 비만이죠. 근데 민휘는 안 먹어야 한다고 하면 음식이 있어도 먹질 않아요. 제가 매니지먼트한 배우 중 최고의 프로예요.”

소속사 대표 김은경(44·여)씨의 자랑이다.

“세계적 영화제서 상 받겠다”

이번 영화는 지난 3일부터 찍었다. ‘서로 닮아가기’를 주제로 오는 9월 제10회 장애인인권영화제에 출품된다. 이날은 다섯 번째 촬영. 그런데 현장 분위기를 보면 1년쯤 동고동락한 사이 같다. 도둑 역의 전영웅씨는 “민휘는 아이같이 순수해서 사람들에게 바로 마음을 열어버려요. 교감이 빠르게 이뤄지죠”라고 말했다. 순수함은 연기에도 도움이 된다. 박 선생은 “상황을 받아 들이는 믿음이 어린아이 같다”고 했다.

민휘씨는 대사를 몇 번만 읽으면 그 역할을 직관적으로 잡아낸다고 한다. 그는 “다른 배우들은 대사를 외워서 연기하려고 해요. 전 이해가 잘 안 돼요. 머리로 상황을 그리면서 하면 잘할 텐데…. 대사는 몇 번만 보고 그 뒤로는 안 봐요”라고 말한다.

“수연씨 사랑합니다.”

자신 있는 연기를 묻자 민휘씨는 “사랑 고백하는 연기”라며 즉시 옆에 앉은 여자 스태프에게 연기를 펼쳤다. 웃고 장난치다 갑자기 몰입하고 다시 빠져나온다.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지적 장애’라는 한계는 분명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일반 배우를 당할 순 없다”고 박 선생은 말했다. 상황 이해와 판단력도 떨어진다. 감독은 “촬영할 때 동선을 한번에 숙지하지 못 한다”고 말했다.

가장 큰 장벽은 발음. 다운증후군 환자는 발음이 부정확하다. 그것은 배우에게 치명적 약점이 된다. 한계를 넘어서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연습, 또 연습…. 민휘씨의 일과는 온통 연습으로 채워져 있다. 오전 9시부터 꼬박 12시간 동안 소속사에 머문다. 플루트를 불면서 호흡 훈련을 하고, 춤과 노래를 배우면서 발성 훈련을 한다. 감성 다스리기와 화술은 연기 연습으로 익힌다. 일반 연기자들과 대사 연습도 한다.

“힘들지 않아요. 하루 종일 해도 재밌어요.”

민휘씨는 진심으로 즐기는 듯했다. 현재 민휘씨는 대사의 70∼80%를 전달한다. 엄청난 연습의 결과다. “예전엔 대사의 절반도 알아듣기 힘들었어요. 6년 동안 노력해서 이만큼 발전한 거예요.” 박 선생의 말이다.

“강동원 같은 배우가 되고 싶어요. ‘형사’에서 칼 뽑을 때 강동원의 눈빛은 정말….”

묻지도 않았는데 민휘씨는 닮고 싶은 배우에 대해 얘기했다. 7월이면 민휘씨가 조연으로 출연하는 영화 ‘독 짓는 늙은이’ 촬영이 재개된다. 뇌경색으로 오른쪽 팔다리가 마비된 주연 배우 김인문씨와 호흡을 맞춘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세계시장에도 나가고 영화제에서 상도 받게 되기를 원한다. 자신을 보고 더 많은 장애 배우들이 탄생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최근엔 오락 프로그램 출연 꿈을 키우고 있다. “민휘의 사교성과 유머감각이라면 무조건 성공할 것”이라고 김 대표가 말했다. 받아주는 데가 있을까?

“저희가 직접 제작이라도 할 겁니다. 올해 안에 꼭 해낼 겁니다.”

김 대표의 확신은 단단해 보였다. 다운증후군 환자가 비장애인들과 어울려 농담을 주고받는 오락 프로그램. 지적 장애인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는 ‘배우 강민휘’의 발걸음이 바쁘다.

김원철 기자 wonch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