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정원교] 우리의 등 뒤에 조국이 있다?
입력 2010-04-14 18:00
“그들 뒤에는 가족이 있지만, 조국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건 아닐까”
휴일 이른 아침 남한산성에 오르기 전 특수전사령부 옆을 지나다 군가 소리를 듣게 되면 오래전 기억이 되살아난다. 동시에 그 군가들은 30여년 전 군대 생활할 때와는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한 자루 총을 메고 굳세게 전진하는 우리의 등 뒤에 조국이 있다.” ‘진군가’ 중 마지막 소절을 듣노라면 더욱 그렇다.
차마 되뇌고 싶지 않은 어두운 역사의 현장 남한산성. 병자년이 저물어 가던 때 이곳으로 몽진했던 인조는 세 보름 만에 삼전도로 나아가 청 태종에게 항복하지 않았던가.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려야 했던 인조의 흉중(胸中)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산에 올라가면서는 적병이 겹겹이 에워싼 산성 안에서 혹한과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스러져간 군병들을 떠올려보기도 한다.
군에 있을 동안 행군할 때나 부대 내에서 수시로 불렀고 영내 확성기를 통해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군가들. 그때는 습관적으로 부르고 듣고 했던 것 같다. 군가가 일상의 하나였으니 가사의 의미를 진지하게 음미하는 것조차 필요치 않았는지도 모른다. 새삼 이 같은 생각에 빠져 있는 나 자신을 보면서 천안함 침몰 때문이라는 걸 깨닫는다.
지난 주 있었던 천안함 생존 장병 기자회견에서는 마음 아프게 하는 장면이 적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한 부사관의 사고 순간 증언은 잊히지 않는다. “캄캄한 공간 속에서 살아나야겠다는 일념으로… 가족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고…”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그 누구보다 가족 얼굴이 먼저 떠오르는 건 자연스럽다. “부모 형제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룬다”(군가 ‘진짜 사나이’)에서 보듯 가족은 힘든 군대 생활에서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하지만 환자복 차림의 장병들 발언에서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던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지난 3일 고 한주호 준위 장례식에서 UDT대원들이 부른 ‘사나이 UDT가’는 차라리 처절한 절규였다. “우리는 사나이다 강철의 사나이 나라와 겨레 위해 바친 이 목숨∼” 벌겋게 상기된 얼굴, 두 뺨을 타고 내리는 눈물…. 사나이들은 왜 그토록 뜨거운 눈물을 흘렸을까. 존경하는 선배를 먼저 보내는 비통함 말고도 그 무엇이 있는 듯했다. 군을 매도하는 데 대한 울분 같은 것이 섞여 있었을까. “나라와 겨레 위해 바친 이 목숨”이라는 대목에 이르러 격한 감정을 느낀 건 아니었을까.
김성찬 해군참모총장이 지난 9일 경기도 평택 해군아파트 내 고 김태석 상사 집을 방문한 건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김 총장이 이 자리에서 “국가를 위해 희생했기 때문에 국가가 끝까지 책임지겠다”고 밝힌 것도 적절했다. 그럼에도 아쉬움은 남는다. 그는 천안함 침몰 사건 직후 생존자들도 찾아봤어야 했다. 김 총장은 “고개를 떨구지 마라. 제군들은 충실히 임무를 수행한 영웅들이다”라며 일일이 악수하고 격려하는 게 마땅했다.
어제 오후 점심 식사 뒤 여의도공원 문화마당에 나가봤다. 학생과 직장인들은 천안함 사고에 대한 각자 생각을 매직펜으로 종이에 옮기고 있었다. 제법 쌀쌀한 날씨였지만 진지한 표정이었다. 국기게양대 부근에 마련된 ‘희망의 벽’ 게시판은 이미 빈 공간이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 가장 눈에 띄는 글은 ‘당신은 영웅입니다’였다.
우리 군은 ‘국민의 군대’로 불린다.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하고선 군이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다는 의미다. 천안함 침몰 사건은 현재진형행이지만 군은 이번 일이 벌어진 뒤 과연 이 호칭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줬는가. 군의 공보 기능은 언론의 보도 태도와 함께 미숙함에 있어서 쌍벽을 이룰 정도였다. 정부가 고 한주호 준위 이야기를 교과서에 싣기로 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국가를 위해 몸 던진 사람들을 제대로 예우했던가. 생존 장병 기자회견을 보면서, ‘사나이 UDT가’를 들으면서 느꼈던 감정의 실체가 이제서야 드러나는 것 같다. 그들은 과연 군가의 한 대목처럼 “우리의 등 뒤에 조국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혹시라도 그들 뒤에는 가족이 있고, 조국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건 아닐까. 갑자기 오싹 소름이 끼친다.
정원교 카피리더 wkchong@kmib.co.kr